수성궁(壽成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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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의 후궁들이 문종 사후에 모여 살던 궁가(宮家).

개설

문종은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와의 사이에서 단종을 낳았다. 문종에게는 현덕왕후 권씨 외에도 여러 후궁이 있었지만 모두 자녀가 없거나 옹주만 출산하였다. 왕자를 낳은 경우도 있으나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문종 사후에 후궁들은 궁궐을 떠나야 했고 단종은 이들을 수성궁에 모여 살도록 하였다(『단종실록』 2년 3월 13일).

위치 및 용도

수성궁의 위치는 『연산군일기』의 “서편에 새로 쌓는 성은, 영추문(迎秋門) 북편에서 똑바로 풍저창(豐儲倉) 북편으로 걸쳐, 수성궁 서편 옛 성 밑에 이르기까지 축조하게 하라.” 하는 기사를 통해 경복궁 서편에 자리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연산군일기』1년 1월 9일).

수성궁은 문종 사후에 문종의 후궁들이 모여 살던 궁가로, 연산군대에 성종의 후궁들이 들어가 살면서 정청궁(貞淸宮)으로 개칭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15일).

변천 및 현황

문종에게는 숙빈홍씨(肅嬪洪氏), 숙의문씨(淑儀文氏), 소용권씨(昭容權氏), 소용정씨(昭容鄭氏), 소훈윤씨(昭訓尹氏), 승휘유씨(承徽柳氏), 궁인장씨(宮人張氏), 사칙양씨(司則楊氏) 등의 후궁이 있었다. 모두 문종이 세자였을 때 간택해서 들인 후궁들로, 소생이 없거나 옹주를 출산했다. 소용정씨와 궁인장씨의 경우 왕자를 낳았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때문에 후궁들은 문종이 승하하자 궁궐에 남지 못하고 개인의 궁가(宮家)를 하사받지도 못했다. 대신 모두 왕실에서 정해 준 장소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1454년(단종 2)에 문종의 후궁들이 사는 곳을 수성궁이라 칭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1455년(세조 1)에는 수성궁에 별감(別監)·소친시(小親侍) 24인과 9품의 체아(遞兒) 1인을 두어 후궁들의 시중을 들고 수성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수성궁의 관장은 액정서(掖庭署)에서 담당하며 그곳에서 필요한 물품들은 내탕금으로 구입하여 들였다(『세조실록』 1년 11월 13일).

1503년(연산군 9)에는 수성궁 담장 밑에 사는 집들을 철거하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11월 8일). 1504년(연산군 10)에는 수성궁의 후궁들을 세종의 후궁들과 성종의 폐비 윤씨(尹氏)가 거처하던 자수궁(慈壽宮)으로 옮겼다. 수성궁의 옛 건물들은 새로이 고쳐 성종의 후궁들이 거처하도록 하였다. 궁가의 이름도 정청궁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에 정청궁을 지으면서 다시 수성궁이라 불렀다. 자수궁으로 옮겨 갔던 후궁들도 다시 수성궁으로 돌아와 이곳에 살았다.

참고문헌

  • 지두환, 『문종대왕과 친인척』1~2, 역사문화,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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