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松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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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영 |
한글표제 | 송영 |
한자표제 | 松營 |
동의어 | 개성부(開城府),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 개성유수영(開城留守營) |
관련어 | 유수부(留守府)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이규철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영(松營) |
조선후기 정조대 이후 도성 인근에 유수부(留守府)를 두면서 개성유수부를 부르던 별칭.
개설
조선은 건국 후 1394년(태조 3)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이후 태조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개성으로 고쳐 부르도록 지시했다. 또한 태조는 다음 해 개성부를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라 개칭하도록 지시했다. 조선후기에는 도성 방어를 위해 한성부 주변의 행정·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선정해 유수부를 설치해 운영했다. 유수부는 주·부·군·현의 일반적 행정 체계와는 달리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설치되었으므로 별도의 행정 체계와 임부를 부여받고 운영되었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태조 선조(先祖)들의 고향이 되는 전주에 유수부가 설치되었다. 반면 조선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전란을 겪은 뒤 도성의 방위 체계를 구축하고 강화하기 위해 개성·강화·수원·광주의 4개 도시에 유수부가 설치·운영되었다. 따라서 개성유수부는 고려대의 국도이자 도성 방위 체계의 한 축이 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지역으로 평가할 수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은 1395년(태조 4) 개성부를 개성유후사라 개칭했다. 유후사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높은 지방 행정 단위였다. 조선에서 개성에 유후사를 설치했던 조치는 전조(前朝)의 수도를 대우해주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조치는 태조 선조들의 고향이었던 전주에 유수부를 설치했던 의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도성 방어를 위해 한성부 주변의 행정·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선정해 유수부를 설치해 운영했다. 유수부는 주·부·군·현의 일반적 행정 체계와는 달리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설치되었으므로 별도의 행정 체계와 임부를 부여받고 운영되었다.
특히 조선중기를 지나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뼈아픈 경험은 도성 방위 체계의 구축과 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줬다. 특히 두 전쟁에서 조선은 모두 한양이 함락되는 치욕을 경험했다. 따라서 양란 이후 조선은 수도 방위를 위한 특단의 대책을 필요로 했다.
조선은 도성 방위 체계를 완비하기 위해 개성·강화·수원·광주의 4개 도시에 유수부를 설치해 운영했다. 의례적 의미와 함께 군사 임무 수행을 위해 유수부를 설치·운영했던 것이다. 따라서 개성유수부는 고려대의 국도이자 도성 방위 체계의 한 축이 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는 도성 방어를 위해 한성부 주변의 행정·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선정해 유수부를 설치해 운영했다. 유수부는 주·부·군·현의 일반적 행정 체계와는 달리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설치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별도의 행정 체계와 임무를 부여받고 운영되었다.
조직 및 역할
조선은 건국 후 1394년(태조 3) 개성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태조는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 설치 후 유후(留後) 1명과 부유후(副留後) 2명을 두었다. 당시 유후사는 조선에서 가장 높은 지방 행정 단위였다. 이후 행정 실무를 처리하기 위해 단사관(斷事官)·경력(經歷)·도사(都事) 등의 직책을 설치해 임무를 맡겼다. 1438년(세종 20)에는 다시 개성부로 개편하고 종2품 유수 2인을 두었는데, 이 중 1명은 경기관찰사가 겸임하도록 했다.
유수부의 조직은 행정조직과 군사조직의 이원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 설치 당시에는 유후사의 조직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러나 세종 20년 유수제가 완성되면서 유수와 부유수 등으로 책임자의 명칭을 변경했다. 세조대 유수제가 잠시 폐지되었으나 예종대 다시 회복하면서 유수, 부유수와 함께 종4품의 경력, 종5품의 도사를 각각 1인씩 두었다. 아울러 부민(府民)의 교육과 향촌의 교화를 위하여 교수(敎授) 1인을 두었다. 그리고 이 밑에 경아전(京衙前)으로 서리(胥吏) 40인을 배속시켰다.
유수부의 현실적 군사·행정 기능이 강화되었던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을 겪은 뒤였다. 양란을 통해 큰 피해를 경험한 조선은 군사력 약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행정력과 군사력을 강화하는 일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 결과가 바로 비변사의 기능 강화와 군사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변천
1438년(세종 20) 세종은 개성유후사를 다시 개성부로 개편하고 종2품 유수 2인을 두었는데, 이 중 1명은 경기관찰사가 겸임하도록 했다. 1485년(성종 16)에는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개성부의 직제는 유수 2인으로 이 중 1인은 경기관찰사 겸임, 경력 1인, 도사 1인, 교수 1인, 서리(書吏) 40인, 조례(早隷) 30여 인으로 바뀌었다.
개성유수부는 1896년(고종 33) 관찰부로 개편되면서 부윤을 두었다가 다음 해 관찰부가 폐지되면서 다시 개성부로 환원되었다. 1906년(고종 43) 개성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930년 12월 제령(制令) 제15호에 의해 지방 행정구역이 개편되어 부제(府制)가 실시되면서 다시 개성부로 개칭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이존희, 「朝鮮王朝의 留守府 經營」, 『韓國史硏究』47, 한국사연구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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