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장(細仗)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조선 왕을 표현하는 의장 등급 중의 하나로 왕 부재 시에 왕을 표현할 경우 사용하는 의장.

개설

국가의 제사에 사용하는 향(香)을 전달하거나, 시책문(諡冊文)을 새긴 시책(諡冊)・왕이나 왕후의 시호를 새겨 넣은 도장인 시보(諡寶)를 전달할 때, 궁궐 안의 전정(殿庭)이 아닌 궐 밖 행차 시 임시로 머무는 노차(路次)에서 사신에게 명령을 내릴 경우에 사용되는 의장을 세장이라고 한다.

세장은 왕 의장물의 사용에 있어서 특수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왕이 직접 참여하는 의례는 아니지만, 왕을 상징하는 의장이 필요한 경우에 사용되었다. 제사에 사용하는 향을 전달하거나 시책과 시보를 전달하는 것은, 왕이 직접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대리하는 관원이 대행하였다. 그러나 향이나 시책, 시보 등은 왕의 명이 담긴 물건이므로 이를 수행하는 왕의 의장이 필요하였고, 이 경우 세장이 사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의 왕이 사용하는 의장은 크게 3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각 의장 등급에 따라 의장에 포함되는 의장물의 수가 달랐고, 하나의 의장물이라도 각 등급에 따라 몇 개가 사용되는지 달랐다. 가장 큰 규모의 의장 등급은 전정대장(殿庭大仗), 다음 등급은 전정반장(殿庭半仗), 마지막은 전정소장(殿庭小仗)이었다.

이들은 각기 행사의 규모나 중요성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었다. 또한 이러한 행사가 궁 밖에서 열리며 그에 따라 왕이 행차해야 할 경우, 각 등급의 의장물들이 배치 순서에 따라 어가를 수행하였는데 이를 노부(鹵簿)라고 한다. 이 노부 또한 의장과 마찬가지로 3등급으로 나뉘는데, 전정의장(殿庭儀仗)이 행차 시에는 대가노부(大駕鹵簿)가 되고, 전정반장은 법가노부(法駕鹵簿), 전정소장은 소가노부(小駕鹵簿)가 된다. 즉 조선에서는 전정에서의 의장과 왕 행차 시의 노부가 같은 구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역대 중국왕조 및 고려왕조와 달리 조선의 의장 체계가 가진 독특한 특성이었다.

세장은 중국의 고대 문헌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고려시기의 의장 및 노부를 기록하고 있는 『고려사(高麗史)』 「여복지(輿服志)」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추측컨대 세장은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고안한 의장 체계로 보인다. 세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46년(세종 28)으로 세종이 우의정(右議政) 하연(河演)을 보내어 먼저 사망한 왕비 심씨(沈氏)에게 시책과 시보를 주면서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세종실록』 28년 6월 23일). 이로 보건대 세장의 의장 등급은 적어도 세종 이후 정비된 것으로 보이나, 그 구체적인 시기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세종실록』「오례」에서는 명나라 황제의 표문에 배례를 행할 경우에도 세장 의장을 사용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러한 의식에서는 의례의 중심이 조선 왕이 아닌 명나라 황제가 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조선 왕의 의장을 최대한 간소화한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세종실록』「오례」에 세장 규정으로 등장하였던 왕이 중국 황제의 표문을 받던 배표(拜表) 의식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는 제외되고 있다. 즉, 세종대 이후부터 1474년(성종 5) 『국조오례의』 성립 이전 시기에 세장은 왕 부재 시의 의장으로 그 개념이 통일되어 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배표 의식에서는 소장의장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절차 및 내용

세장 등급의 의장물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소가노부의 세주로 세장 등급이 정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의장물 구성은 소가노부와 동일하거나, 소장의장에서 일정한 의장물을 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국조오례의』에서는 외방에서 왕의 의장을 사용할 경우, 세장의 반을 쓴다고 하였는데 역시 구체적인 의장의 구성물은 확인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통전(通典)』
  • 『문헌통고(文獻通考)』
  • 백영자, 『조선시대의 어가행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1994.
  • 강제훈, 「조선전기 국왕 의장제도의 정비와 상징」, 『사총』77, 201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