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수어(石首魚)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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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석수어 |
한글표제 | 석수어 |
한자표제 | 石首魚 |
대역어 | 조기 |
동의어 | 석수어(石秀魚), 석어(石魚), 조긔, 족의, 추수어(䠓水魚), 황석수어(黃石首魚) |
관련어 | 가족의, 건석어(乾石魚), 구비석수어(仇非石首魚), 백상(白鯗), 부염석어(剖鹽石魚), 상어(鯗魚), 석수어란해(石首魚卵醢) |
분야 | 생활·풍속/식생활/음식 |
유형 | 식재료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주영하 |
생산지 | 한반도 서해안 |
수확시기 | 3~6월 |
관련 의례 | 왕실 수라, 왕실 잔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석수어(石首魚)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6년 4월 1일, 『세종실록』 2년 5월 20일, 『세종실록』 11년 7월 19일, 『세조실록』 6년 7월 1일 |
조기라고 불리며 민어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의 한자 이름.
개설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먹었던 생선으로 오늘날 조기를 말한다. 주로 서해안과 남서해안에서 잡히는데 어획량이 많을 때는 파시(波市)가 열릴 정도였다. 파시는 해상에서 열리는 시장이다. 파시의 주요 지점은 영광의 각리도(角里島)와 작도(鵲島), 부안의 위도(蝟島), 해남의 추자도(楸子島), 나주의 도초도(都草島) 등지였다. 평안도의 의주목, 황해도의 해주목, 경기도의 수원도호부와 부평도호부, 충청도의 홍주목, 전라도전주부·나주목·장흥도호부 등지의 해안 마을에서 토산물로 진상하였다. 특히 전라도와 평안도의 조기는 어획량이 많아서 왕실에 진상되는 양이 많았다.
조선시대에 조기를 잡는 방법으로는 주로 어전(漁箭)을 이용하였다. 어전은 다른 말로 ‘어살’이라고 불렀다. 조선왕실에서는 어살을 설치하는 일을 관청에서 주관하도록 했고, 이것을 바닷가에 사는 어민들에게 넘겨서 조기를 잡도록 했다. 관청에서 그 설치에 관여한 탓에 서해안의 어살은 잡히는 어획량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세금을 매겼다. 어살마다 어획량에 대한 대장(臺帳)을 만들어 이것을 호조(戶曹)·도(道)·고을에 비치했다. 어민들은 이에 근거하여 ‘어전세(漁箭稅)’를 냈다. 조기가 떼를 지어 몰려올 때는 그물로 잡았다. 전라도 고흥 앞바다에서는 춘분 후, 충청도 위도 앞바다에서는 한식 후, 황해도 해주 앞바다에서는 소만 후에 그물로 잡았다.
원산지 및 유통
조기는 한반도의 서해와 서남해 연안을 비롯하여 일본, 동중국해, 타이완 연해에 분포한다. 제주도의 서남해와 동중국해에서 겨울을 보낸 뒤 3월부터 서해를 따라 북으로 이동한다. 3월 하순에서 4월 중순경에 충청도의 위도 앞바다, 4월 하순부터 5월 중순경에 연평도 근해, 6월 상순경에 압록강의 대화도 부근, 6월 하순경에 발해만까지 이른다. 조기가 떼를 지어 도착하는 곳에 어민들이 모여들어 파시를 형성했다.
조기는 생조기 상태는 물론이고 소금에 절인 부염석어(剖鹽石魚) 상태로 유통되거나, 조금만 절여서 그늘에 말린 구비석수어(仇非石首魚) 상태로 유통되었다. 구비석수어는 오늘날 ‘굴비’라고 불리며, 가장 맛있게 조기를 보관하는 방법으로 만든 것이다. 어민들은 조기의 배를 갈라 넓적하게 펴서 말린 가조기를 유통시키기도 했다. 가조기는 다른 말로 상어(鯗魚), 백상(白鯗), 건석어(乾石魚), 가족의라고 불렸다.
조기의 알을 젓갈로 만든 석수어란해(石首魚卵醢)도 있었다. 조선후기가 되면 왕실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석수어란해를 즐겨 먹어 진상할 것이 상태가 좋지 않게 되는 일도 생겼다. 석어해(石魚醢)는 조기젓이다. 고종 때 서울 마포에 살던 반인(泮人) 출신 이의상(李義祥)이 석어해 3속을 왕실에 바쳤을 정도로 민간에서도 조기젓이 널리 유행하였다.
연원 및 용도
조기는 왕실에서 종묘의 천신(薦新) 제물로 사용하였는데(『태조실록』 6년 4월 1일), 조선후기에는 매년 3월에 경기도 감영에서 황석수어, 황해도 감영에서 생석수어를 천신 제물로 올렸다.
왕실의 일상 식사와 잔치의 반찬, 왕이 친척이나 신하들에게 주는 선물용으로도 쓰였다. 세종은 양녕대군에게 술과 함께 석수어 2백 속을 보냈다(『세종실록』 2년 5월 20일). 중국의 북경이 서해와 멀리 떨어져 있어 조기를 구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명나라에서 조기를 보내 달라는 요청이 있을 때마다 사신 편으로 보냈다. 세종 때에는 명나라에서 조기 1,000마리를 보내 줄 것을 조선에 요청하여 보낸 적이 있다(『세종실록』 11년 7월 19일).
1634년(인조 12) 6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책봉을 위해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에는 석수어(石首魚) 6마리가 1번의 식사 준비에 쓰였고, 중국 사신들을 따라간 시녀들에게도 의주에서 북경까지 갈 때에 석수어가 반찬으로 제공되었다. 인조의 첫째 아들인 숭선군(崇善君)이징(李澂)의 혼례 때에도 석수어 100속, 즉 2,000마리가 쓰였다. 또한 아교의 일종인 어교(魚膠)로 가공하여 활을 만드는 데도 쓰였다(『세조실록』 6년 7월 1일).
이응희(李應禧)의 『옥담시집(玉潭詩集)』에는 석수어에 대한 시가 있다.
비릿한 바람이 바다 어귀에 불면 / 腥風擁海口
배가 노란색으로 볼록한 것이 어선에 가득하네 / 黃腹滿魚船
불에 구우면 좋은 반찬이 되고 / 爛炙知佳餐
탕으로 끓여도 맛이 싱싱하여라 / 濃湯作美鮮
그 생김은 비록 크지 않지만 / 形容雖不碩
쓰임새는 한두 곳이 아닐세 / 爲物用無偏
가장 좋은 건 말린 것이니 / 最憐乾曝後
밥반찬으로 가장 으뜸이라네 / 當食必登先
이로 미루어 석수어를 불에 굽거나 탕으로 끓여서 먹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굴비는 밥반찬으로 인기가 있었다. 석수어는 날것으로 조치, 즉 찌개를 해 먹거나 숯불에 구워서 먹었다. 날것으로 조치를 끓일 때 그 허리를 주무르면 살이 헤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날 조기의 유통 시간이 길 경우 상태가 좋지 않아 맛이 없었다. 그래서 주로 말린 굴비의 형태로 유통된 것을 찌거나 구워 먹었다. 굴비는 소금에 절여 통째로 말린 것이 배를 갈라 말린 것보다 맛이 좋다. 말릴 때 반쯤 마른 뒤 씻어서 다시 말리면 겯지 않았다. 조기의 암컷 알로 젓갈을 만든 석수어란해도 고급 음식으로 꼽혔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산림경제(山林經濟)』에서는 1620년(광해군 12)에 이창정(李昌庭)이 편찬한 의서(醫書)인 『수양총서류집(壽養叢書類輯)』을 인용하여 조기는 “음식을 먹을 때 입맛을 당기게 하며, 몸의 원기를 보태준다. 조기 말린 것은 음식을 먹고 소화가 잘 되지 않는 숙식(宿食)을 사라지게 한다. 조기 머리에 바둑알만한 돌이 있는데, 이것을 갈아서 먹으면 임질(淋疾)을 치료할 수 있다. 순채와 함께 국을 끓여 먹으면 매우 좋으며, 오래 묵은 것일수록 좋다.”고 하였다.
허균(許筠)도 “서해 곳곳에서 나는데, 모두 맛이 좋다.”고 하였다. 한편, 18세기 서울 사람들은 조기가 100일 안에 3번이나 잡힌다고 하면서 맨 먼저 잡힌 것이 크고 맛이 좋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가례등록(嘉禮謄錄)』
- 『규합총서(閨閤叢書)』
- 『산림경제(山林經濟)』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수양총서류집(壽養叢書類輯)』
- 『영접도감잡물색의궤(迎接都監雜物色儀軌)』
- 『옥담시집(玉潭詩集)』
- 『자산어보(玆山魚譜)』
-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 『천신진상등록(薦新進上謄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