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산성(瑞興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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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서흥군(瑞興郡) 고성리(古城里)에 있는 산성.

개설

황해도 서흥군에 있는 산성으로 최초 축조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고구려 광개토왕대 백제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394년(고구려 광개토왕 4) 남방 지역에 일곱 성을 축조할 당시 함께 축조되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들어서는 북방의 방어를 위해 762년(신라 경덕왕 21) 여섯 곳에 성을 축조하였는데 그중 오곡성(五谷城)이 서흥산성으로 비정된다. 고려초기에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이 성이 피해를 입었고, 고려말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시에도 이 성에서 남하하는 홍건적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황해도 지역을 통과하는 의주대로상의 정방산성, 태백산성 등과 함께 이 지역 방어의 핵심 산성으로서 매우 중시되었다. 정유재란 당시 최초로 본격 개축되었고 정묘호란 이후에는 북방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1631년 다시 개축하였다.

위치 및 용도

서흥산성이 위치한 서흥은 북쪽의 의주에서 한성으로 들어오는 길인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요충으로서 북방의 적을 제압하기 좋은 곳이었다. 아울러 서흥산성은 서흥의 진산(鎭山)으로서 산의 형세가 아주 험하여 쉽게 포위되지 못하고 적군이 포위하더라도 주위의 성원을 받을 수 있어 평지에 고립되어 있는 황주나 평산보다 방어에 유리하였다. 따라서 서흥산성의 군사적 중요성은 매우 컸다. 다만 이 의주대로가 봉산―서흥―평산을 거쳐 지나가는데, 서흥산성은 서흥의 읍치로부터 39리(약 15㎞)나 떨어져 있어 이 대로를 직접 차단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서흥에는 읍성이 축조되어 있지 않아 서흥산성의 군사적 가치는 계속 유지되었다. 특히 조선후기 황해도 지역을 통과하는 의주대로상의 정방산성, 태백산성과 함께 이 지역 방어의 핵심 시설로서 매우 중요하였다.

변천 및 현황

조선초기에도 서흥산성은 군사적 요충으로서 지형이 험하고 견고하였으므로 계속 관리되었다(『세조실록』 2년 11월 16일). 성 내부에는 우물이 2곳, 연못이 1곳 있었으며, 서흥, 수안, 곡산, 신계, 우봉(牛峯), 토산(兎山), 황주, 봉산 등지의 군창(軍倉)이 있는 등 황해도 지역 방어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수축이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정유재란 당시 황해감사유영경과 서흥부사조정견(趙廷堅) 등의 책임하에 본격적으로 수축되었다.

1627년(인조 5) 초 정묘호란 이후 서북지역 방어 대책의 일환으로 산성 방어 전략이 채택되면서 서흥산성의 수축 논의가 나타났다(『인조실록』 6년 9월 15일). 그 일환으로 황해도 지역의 산성에 대한 수축이 이루어지면서 1631년(인조 9) 서흥산성도 수축하도록 하였다(『인조실록』 9년 3월 22일). 1634년(인조 12)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산성에 포진한 조선군을 그대로 두고 대로를 따라 남하하여 남한산성에서 인조에게 항복을 받았다. 이에 산성 중심 방어 전략의 문제점이 드러남에 따라 대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서흥산성의 문제점이 적지 않게 제기되었다(『숙종실록』 4년 12월 3일). 따라서 1680년(숙종 6)에 서흥산성에 소속되어 전쟁 시 이곳의 방어를 담당하던 수안과 곡산 소속 군병은 서흥산성으로 들어오지 않고 근처의 고개를 지키도록 하되 대신 창고의 곡식과 군기는 산성에 두도록 하였다. 대신 황해감사는 서흥산성에 행영(行營)을 설치하여 주둔하면서 주변의 고개 방어를 응원하도록 하는 방안이 마련되었다(『숙종실록』 6년 1월 6일). 평시에는 이곳에 별장(別將) 1인과 승장(僧將) 1인, 부장(部將) 133명, 수첩군관(守堞軍官) 50명, 모군(募軍) 50명을 두어 방어 및 산성의 관리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형태

조선후기 대흥산성은 석축(石築) 산성으로서 그 둘레는 20,238자이고 높이는 21척 8촌이었다. 치첩(雉堞)은 745개소이고 옹성(甕城)은 3군데 있었다. 남문루와 북문루는 3칸, 장수가 올라서 지휘하는 장대(將臺)와 대포 등 화기를 쏠 수 있는 포루(砲樓)는 각각 2칸이었다. 남문 안에는 길이 45자(약 14m), 너비 30자(약 9m), 깊이 5자(약 1.5m)의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관련사건 및 일화

고려초 거란과의 전쟁에서 서흥산성은 함락되기도 하였고 고려말 홍건적이 강을 건너 침공하였을 때 이 성에서 전투가 있었으나 저지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고승희, 「조선후기 황해도 내지 방어체계」, 『한국문화』38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