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명(削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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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성균관재회(齋會)에서 지탄받을 행동을 한 유생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하는 벌.

개설

삭명은 성균관 유생들이 자치회인 재회에서 결정하여 유생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벌이다. 유생으로서 유현(儒賢)을 헐뜯은 사람을 벌주거나 조정의 관원들을 탄핵하는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삭명은 주로 유현을 헐뜯은 유생에게 가한 벌이다. 삭명의 종류는 먹으로 이름을 지우는 묵삭(墨削), 북을 치고 성토하면서 유적에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명고영삭(鳴鼓永削), 누런 종이를 붙여서 영구히 이름을 지우는 부황영삭(付黃永削)의 세 종류가 있다. 이를 당한 유생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는 등의 불이익을 당하였다.

변천

광해군 때에 성균관 유생인 김육(金堉) 등이 정인홍(鄭仁弘)을 유적에서 삭제하였다. 당시 정인홍이 문원공(文元公)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이황(李滉)을 비방하고 배척하면서 문묘 종사(從祀)가 합당치 않다고 하자 태학생들이 그 이름을 성균관·향교·서원에 소속된 유생들의 이름을 기록한 명부인 청금록(靑衿錄)에서 삭제하였다. 그러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주동한 유생을 유적에서 삭명하여 종신토록 금고(禁錮)시키라고 명령하였다(『광해군일기』 1년 1월 24일). 이에 여러 유생이 권당(捲堂)을 결행했고, 이조 판서이정구가 대궐에 이르러 진계(陳啓)하니 광해군이 그 명령을 보류하였다. 효종 때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헐뜯은 경상도 유생 유직을 태학생들이 삭명하였다[『효종실록』 1년 7월 1일].

1681년(숙종 7) 대사성김만중은, 유벌(儒罰)을 받은 유생이 미처 그 벌에서 풀려나기 전에는 학궁(學宮: 성균관)의 과제(課製)에 나아갈 수 없게 하되, 과거 응시에 있어서는 조사(朝士)로서 삭직(削職)된 사람이 응시하는 예와 같이 모두 응시를 허락하자는 건의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숙종실록』 7년 6월 2일]. 그러나 식년시와 별시에는 응시하지 못했지만 정시·알성시 응시는 허락하였다.

삭명 가운데 부황영삭은 주로 조정의 벼슬아치들이 그 대상이 되곤 했는데, 『속대전(續大典)』에 이를 금지하는 규정이 등재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반중잡영(泮中雜詠)』
  • 『태학지(太學志)』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