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焚書坑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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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이 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묻어버린 사건.

개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이후 권력을 확대하고자 종래 혈연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면서 전제 왕권을 강화하였다. 당시 유가와 타 학파의 선비들은 진시황의 통치술을 반대하며 당대의 정치를 비판하였다. 이에 진시황은 의약, 점복, 농업에 관한 것을 제외한 민간의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정치를 비판하던 선비들을 생매장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자 관료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비판 혹은 변론하면서 분서갱유(焚書坑儒)의 고사가 자주 언급되었다.

내용 및 특징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진 시황제 26) 천하를 통일한 이후, 권력을 확대하고자 법가인 이사(李斯)를 발탁하여 종래의 혈연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시행하며 법가주의를 표방하였다. 당시 유가와 타 학파의 선비들이 이를 반대하고 공공연하게 자기 학파의 학설을 주장하며 정치를 비판하자, 진시황은 이사의 진언을 수용하여 의약, 점복, 농업에 관한 것을 제외한 민간의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정치를 비판하던 선비들을 생매장하였다.

변천

조선조 선조대에 기대승이 왕 앞에서 『대학』을 강하는 자리에서, 중국한(漢) 무제(武帝)는 진시황이 분서갱유한 뒤에 육경(六經)을 드러내었으니 함께 일해 볼 만한 왕이라고 할 수 있으나 대체로 큰 공로를 좋아하여 내심에는 욕망이 많으면서 겉으로는 인의(仁義)를 과시했기 때문에 동중서(董仲舒) 같은 어진 이를 얻고서도 등용하지 못하고 강도왕(江都王)의 재상으로 삼았다고(『선조실록』 즉위년 11월 17일) 지적했다.

이경진(李景震)은 경연에서 숙부 이이(李珥)를 배척한 정여립(鄭汝立)을 비판하면서 분서갱유를 거론하였다. 그것은 정여립이 이이를 비방하여 배척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성혼이 이이를 변론하다가 참소와 비방을 만나 산으로 돌아갔는데, 이경진은 이를 분서갱유의 재앙으로 비유함과 아울러 자신의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상소하다고 하였다(『선조실록』 18년 6월 16일).

일본의 승려 현소(玄蘇)가 김광(金光)에게 보낸 글에서 "진시황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신선을 좋아하여 일본에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을 요구하였고 일본도 오제삼황서(五帝三皇書)를 요구하였는데 진시황이 보냈으며, 25년 이후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하였으므로 공자(孔子)의 모든 경전은 일본에 남아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김광은 일본에 통용하는 글자는 겨우 마흔여덟 글자가 있을 뿐인데 어떻게 중국 글을 쉽사리 읽고 뜻을 알았겠느냐며 현소의 말을 의심하였다(『선조실록』 37년 2월 23일).

변천

조선후기에 최석정이 『예기유편(禮記類編)』을 저술하였는데, 숙종대 전라도 유생 김재백(金載白) 등 1,000여 명은 상소를 올려, 『예기유편』이 경전을 파괴하고 성현을 업신여기는 짓을 내용으로 담고 있으니 참람하다고 주장했다. 또 당시 통문(通文) 돌린 지방 유생들과 상소를 발의한 사람을 우리에 가두고 조사하고 있어 분서갱유의 화가 이르렀는데도 도리어 침묵하는 사람만 있으니 그 이유는 최석정을 추종하는 무리에 권세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간행한 지 10년도 더 지난 책을 빌미로 삼아 상소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다고 하며, 그들의 주장을 묵살하였다(『숙종실록』 35년 5월 12일). 또한 숙종대에 홍계적은 백관들이 송시열을 참소하고 권상하를 파직시키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면서 "서로 작당하여 삿된 학설을 선동하고 견책하여 파직하라는 청이 끝내 유문(儒門)에 미쳤으니, 분서갱유의 참화가 장차 눈앞에 있게 될 것이고 나라가 위험할 조짐이 보인다."고 주장하였다(『숙종실록』 42년 3월 16일).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유학자 관료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관련해 분서갱유의 고사가 자주 인용되었다.

참고문헌

  • 유교사전편찬위원회 편, 『유교대사전』, 박영사,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