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선장(兵船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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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선의 항해와 전투 등에 필요한 일체의 권한을 갖고 수군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장수.

개설

조선초기의 군선은 왜구 문제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왜구가 점차 감소하고 더 이상 국방상의 문제로 부각되지 않자 군선을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漕運)의 용도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따라서 병선장은 병선 운용의 주목적이었던 해상전투는 물론 양곡을 운반하기 위한 선박 항해의 지휘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어야 했다. 따라서 병선장에게는 병선의 항해와 전투 등에 필요한 일체의 권한이 부여되었다. 병선장은 자신에게 부여된 권한을 바탕으로 수군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내용 및 담당 직무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을 따르면 조선초기의 군선(軍船)은 건조규모에 따라 대선(大船) 8척 중대선(中大船) 17척, 중선(中船) 103척이 있었고, 전쟁 시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무기 등을 갖춘 병선(兵船) 474척, 맹선(猛船) 18척, 중맹선(中猛船) 18척, 별선(別船) 44척, 쾌속선인 쾌선(快船) 34척, 비상시를 대비한 예비 군선인 무군선(無軍船) 57척, 기타선(其他船) 56척의 총 829척으로 편제되어 있었다. 이 외에도 왜구토벌을 위해 예비한 추왜별맹선(追倭別猛船)·왜별선(倭別船)·귀선(龜船) 등의 군선이 제작되어 있었다.

『경국대전』에는 대맹선 80척, 중맹선 192척, 소맹선 216척, 무군맹선 245척, 무군중맹선 3척, 무군대맹선 1척으로 모두 737척의 맹선을 보유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에는 전선(戰船)·귀선·방선(防船)·병선·사후선(伺候船) 등 13종 776척의 군선이 편제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 순조 9년(1809)에 편찬된 『만기요람』에서는 별선·경보선(警報船)·군수선(軍需船) 등 8종의 군선이 추가되어 21종류의 군선 780척이 편제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고려 말의 왜구 문제를 해결하고 해변 방어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군선의 운영 방식을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이성계 등의 조선 건국 세력이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이후 세종의 재위기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대마도 정벌을 단행했다. 당시 정벌군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세종대의 경우 227척의 전선과 17,285명의 병력, 65일분의 군량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세종실록』 1년 6월 17일).

이와 같은 조선의 군선 운영 체제는 많은 수의 병선장을 필요로 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지휘 능력과 항해 능력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더욱이 왜구 문제나 해안 지역 일대의 다양한 문제들이 확연하게 줄어든 조선중기 이후에는 군선들이 세곡 등을 운반하기 위한 조운선으로 쓰이는 경우가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병선장에게 보다 다양하고 우수한 항해 능력을 요구하게 되었다.

특히 군선에는 다양한 역할을 하는 수군들이 탑승했다. 병선장은 이들을 모두 지휘·통제할 수 있어야만 했다. 예를 들어 정조대 편찬된 『전라우수영지(全羅右水營誌)』에서는 병선에 선장 1명, 활을 쏘는 사부(射夫) 10명, 포를 담당하는 포수 10명, 다공(舵工) 1명, 노 젓기를 담당하는 노군(櫓軍) 14명 등 모두 36명이 탑승했던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 물론 군선의 크기나 무장, 탑승 인원 등이 반드시 일정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병선장은 기본적으로 함포와 활, 노 젓는 방식 등의 전투와 항해와 관련된 제반사항을 책임지고 지휘할 수 있어야 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전라우수영지(全羅右水營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속대전(續大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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