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건(朴弼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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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71년(현종 12)~1738년(영조 14) = 68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영조(英祖) 때의 문신. 호조 참판(參判)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 등을 지냈고,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정(襄靖)이고, 자는 경운(景運)이며, 금릉군(錦陵君)에 봉해졌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박태상(朴泰尙)이며, 어머니 조씨(趙氏)는 상의원(尙衣院)정(正)조속(趙涑)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박세견(朴世堅)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참판을 지낸 금주군(錦州君)박정(朴炡)이다.

숙종~영조 시대 활동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나 질병으로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으므로,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1710년(숙종 36) 음보(蔭補)로 영소전(永昭殿)참봉(參奉)이 되었고, 1713년(숙종 39) 전생서(典牲暑) 주부(主簿)를 거쳐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다. 그 뒤 청양현감(靑陽縣監)을 거쳐 1722년(경종 2)에는 정산현감(定山縣監)에 임명되었다.[『경종실록(景宗實錄)』경종 2년 11월 19일] 이어 해주판관(海州判官)을 지냈고,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24년(영조 즉위년) 평소부터 그의 치적을 들었던 이조 전랑(銓郞)조문명(趙文命)이 천거를 하여 선산부사(善山府使)가 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선산부사이던 그는 그 해 3월 좌방장(左防將)으로서 거창(居昌)에서 반란군을 격파하고, 난을 이끌던 이웅보(李熊輔)와 정희량(鄭希亮)을 잡아 목 베었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4년 3월 27일, 영조 4년 4월 1일, 영조 4년 4월 2일, 『국조보감(國朝寶鑑)』 권59] 그는 그 공으로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幾効力奮武功臣) 2등이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급되고 금릉군에 봉해졌다.[『영조실록』영조 4년 4월 26일, 영조 4년 4월 29일] 1729년(영조 5)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가, 이듬해인 1730년(영조 6) 9월 의금부 동지사가 되었다.[『영조실록』영조 6년 9월 29일] 1731년(영조 7) 곡산부사(谷山府使)가 되었는데, 부임하기도 전에 관사(官舍)가 불에 탔다. 이에 관사를 다시 지으면서도 농사일에 바쁜 백성들의 힘을 동원하지 않았으므로 칭송을 들었다. 1733년(영조 9) 2월 다시 의금부 동지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인 1734년(영조 10) 9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9년 2월 8일, 영조 9년 10월 20일] 그 뒤 삼화부사(三和府使)를 거쳐, 1737년(영조 13)에는 호조 참판이 되었다. 1738년(영조 14)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8세이다. 이후 양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아울러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온화하여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나 자신의 공훈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당론과 사치가 나라와 집안을 망치는 고질이라고 보고 유언을 남겨 자녀들을 경계시켰다. 그는 소론 가운데에서도 온건파로서 조문명과 송인명(宋寅明) 등이 주도했던 탕평책(蕩平策)에 적극 동조하였다.

후손

부인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형조 판서를 지낸 이규령(李奎齡)의 딸이다. 3남을 두었는데, 1남은 박사휴(朴師休), 2남은 박사검(朴師儉), 3남은 박사준(朴師儁)이다.

참고문헌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