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우(朴從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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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5년(태종 5)~1464년 (세조 10) = 60세]. 조선 전기 태종~세조 때 활동한 부마, 문신. 봉작은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이다. 본관은 운봉(雲峰)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찬성(贊成)박신(朴信)이고,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조부는 박지의(朴之誼)이고 조모 주씨(周氏)는 주사옹(周思雍)의 딸이다.

세종~세조 시대 활동

1419년(세종 1) 1월 정의궁주(貞懿宮主)의 딸인 정혜옹주와 결혼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운성군(雲城君)에 봉해졌다. 정의궁주는 태종의 후궁으로 권의빈(權懿嬪)라고도 한다. 1420년(세종 2) 자헌대부에 가자되었다. 1423년(세종 5) 4월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 수도인 북경(北京)에 갔다가 그 해 8월에 돌아왔다. 1424년(세종 6) 10월 6일 아내인 정혜옹주(貞惠翁主)가 세상을 떠났다.

1426년(세종 8) 2월 선위사(宣慰使)로 황주(黃州)에 나갔다가 12월 다시 사은 겸 진하사(謝恩兼進賀使)로 명나라 북경에 갔다가 1427년(세종 9) 3월말에 돌아왔다. 그 해 3월 같은 달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운성군이 되었다. 1428년(세종 10) 3월 선위사로 황주에 갔고, 9월 선위사로 평양(平壤)에 갔다. 1420년(세종 12) 6월 선위사로 황주에 갔고, 1431년(세종 13) 12월 선위사로 유후사(留後司)에 갔다. 1432년(세종 14) 5월 선위사로 황주에 갔고, 11월 선위사로 함길도(咸吉道)에 가 새 사신을 선위하였다. 1433년(세종 15) 10월 유후사(留後司)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중국 사신(使臣)을 위로하였다. 1434년(세종 16) 10월 선위사로 평양에 갔다.

1436년(세종 18) 호조 판서가 되고, 윤6월 숭정대부(崇政大夫) 운성군이 되었으며, 12월 경상좌도 병마도절제사(慶尙左道兵馬都節制使)가 되었다. 1437년(세종 19) 1월 운성군이 되었다. 1441년(세종 23) 2월 도진무(都鎭撫)가 되고, 3군장수(三軍將帥)에 참가하였다. 1442년(세종 24) 12월 호조 판서로서 선공감(繕工監)제조(提調)를 겸하였고, 1443년(세종 25) 8월에는 의금부(義禁府) 제조를 겸하였다. 그 해 11월에는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가 설치되어 진양대군(晉陽大君)이유(李*)는 도제조(都提調)가 되고, 의정부 좌찬성(左贊成)하연(河演)과 그는 중추원(中樞院)지사(知事)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제조(提調)가 되었는데, 12월에는 그들 도제조 · 제조들은 서교(西郊)에 가서 전품(田品)을 나누어 시험하였다.

1444년(세종 26) 7월 광덕대부(光德大夫)로 호조 판사(判事)를 겸하였다. 같은 달 수기(壽器)를 장치(藏置)하는 곳을 장생전(長生田)의 옛 터에 짓기로 하였는데 이때 이를 감장(監掌)하게 되었었다. 1445년(세종 27) 3월 이때 부친상 때문에 통진(通津)에 가 있었는데 왕명으로 기복(起復)되어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가 되었다. 1447년(세종 29) 3월 이조 판서가 되었고, 6월 의정부 좌찬성과 이조 판사를 겸하였다. 1449년(세종 31) 8월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가 되어 변경의 방비를 계칙(戒飭)하기에 힘썼다.

1450년(문종 즉위) 2월 의정부 좌찬성으로 있었으며, 7월 성록대부(成祿大夫)가 되었다. 1451년(문종 1) 1월 운성위(雲城尉)로 있었으며, 8월 의금부 제조를 겸하였다.

1453년(단종 1) 3월 의금부 제조운성위로 있었으며, 10월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보좌 세력인 김종서(金宗瑞) · 황보인(皇甫仁) 등 원로 대신을 살해 · 제거하는 데에 가담 협력하였다. 그 협력한 공으로 그 해 같은 달 10월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 운성위가 되었다가, 11월 수충위사 협찬 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이 되었다. 1454년(단종 2) 3월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가 되었다. 이때 그는 군(郡)과 읍(邑)의 연혁(沿革)을 살펴서 정(定)하고, 사군혁파(四郡革罷)를 건의하였다. 그는 1455년(세조 1) 윤6월부터 운성부원군으로 있었다. 1458년(세조 4) 2월 세조가 사정전(思政殿)에서 공신(功臣)에게 중삭연(仲朔宴)을 베풀었는데, 이때 그가 지은 시(詩)가 『세조실록(世祖實錄)』에 전한다.[『세조실록』세조 4년 2월 12일] 그리고 그 해 11월에는 그가 자기 집에서 공신연(功臣宴)을 베푸니 세조가 주악(酒樂)을 내려주었는데, 이로부터 공신(功臣)이 윤차(輪次)로 잔치를 베풀었다 한다.

1464년(세조 10) 7월 8일 세상을 떠나니 나이 60세이다. 박종우는 성질이 어질고 후하고 너그럽고 커서 대신(大臣)의 풍모(風貌)가 있었고, 몸을 가지는데 삼가고 집에 있을 때에도 근엄(謹嚴) 하였고, 사람을 대하거나 물건을 접할 때, 자리가 높았으나 더욱 겸손하였다고 한다. 집안이 대대로 부호(富豪)하여 윤사로(尹師路) · 윤사윤(尹士昀) · 정인지(鄭麟趾)와 같이 재물을 모은 것이 서로 비슷하였으므로, 이들을 일컬어 ‘4부(四富)’ 라 불렀다.(『세조실록』 세조 10년 7월 8일)

시호와 제향

시호는 성렬(成烈)이다. 충청북도 중원군 신니면 마수리 성렬사(成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정혜옹주(貞惠翁主)는 태종(太宗)의 후궁(後宮)인 권의빈(權懿嬪)의 딸이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