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중(朴宜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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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37년(충숙왕 복위 6)~1403년(태종 3) = 67세]. 고려 말 공민왕~조선 초기 태조 때 활동한 문신.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과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을 지냈다. 초명은 박실(朴實) 이고, 자는 자허(子虛)이며 호는 정재(貞齋)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개성이다. 아버지는 판도총랑(版圖摠郞)박인기(朴仁紀)이다. 이색(李穡)의 문인이다.

고려 공민왕~공양왕 시대 활동

공민왕 때 문과(文科)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전의시(典儀寺) 직장(直長)이 되었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헌납(獻納)·사예(司藝)가 되었다.

우왕 때 문하사인(門下舍人)이 되고, 그 뒤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성균대사성 등을 거쳐 밀직 제학(密直提學)이 되었다. 1388년(우왕 14) 2월에 명(明)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려고 하자 그가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험진(公嶮鎭) 이남으로부터 철령(鐵嶺)까지는 원래가 우리나라의 영토이니 돌려달라고 청하여 성사시키고 철령위를 세우는 의론을 정지시켰다. 그는 그 공으로 창왕이 즉위하자 추성 보조 공신(推誠補祚功臣)이 되었다. 공양왕 때 서운관(書雲觀)에서 도선(道詵)의 밀기(密記)에 근거하여 이미 개경의 지운(地運)이 다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도읍을 한양(漢陽)으로 옮겨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자, 그는 임금께 “옛적 인군(人君)이 참위술수(讖緯術數)로써 그 국가를 보존하였다 함은 신이 듣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며 반대하였다. 그 뒤 예문관 제학 겸 성균 대사성이 되었다.

조선 태조 시대 활동

1392년(태조 1) 10월 9일에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 학사(學士)가 되었고, 같은 달 13일 우시중(右侍中)조준(趙浚),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정도전(鄭道傳), 예문관 학사정총(鄭摠), 병조 전서(兵曹典書)윤소종(尹紹宗)들과 함께 『고려사(高麗史)』를 수찬(修撰)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그 공정성을 기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 뒤 검교 참찬 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가 되었다. 1403년(태종 3) 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7세이었다. 성리학에 밝았으며 문장(文章)이 정심(精深)하고 전아(典雅)하였다. 저서로는 『정재유고(貞齋遺稿)』가 있다.

성품과 일화

박의중은 타고난 자질이 명민하고 학문에 독실하였으며 청렴하고 강개하여 평탄함과 험란함에 절조가 한결같았다고 한다. 청렴과 공정성에 대하여는 명나라 임금도 인정한 재상(宰相)이었다. 그리고 그의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이 세상에서 존중을 받아 한 나라 학자의 사표(師表)가 되는 성균관 대사성을, 이색과 정몽주(鄭夢周)에 이어 세 번째로 하였다.

후손

첫째 부인 한씨(韓氏)는 한탑(韓搭)의 딸이고, 둘째 부인 이씨(李氏)는 이수창(李壽昌)의 딸이다. 자녀는 3남을 두었는데, 1남은 박경빈(朴景贇)이고, 2남은 박경무(朴景武)이며, 3남은 박경문(朴景文)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정재유고(貞齋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