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징(朴世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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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34년(인조 12)~1679년(숙종 5) = 46세]. 조선 중기 인조~숙종 때 활동한 학자. 자는 자구(子久)이고, 호는 안곡(顔谷)이며,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아버지는 박상란(朴尙蘭)이며, 어머니 윤씨(尹氏)는 정랑(正郞)윤승현(尹承賢)의 딸이다.

숙종 시대에 맞은 비운

그는 장성한 이후에는 누가 독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일과를 정하여 글 읽기에 힘써서 경서자사(經書子史)에 널리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고 그 뜻을 상세히 구명하였는데,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주역(周易)』에 밝았으며, 성력(星曆)·산수(算數) 같은 것은 다 자기 마음을 스승으로 삼아 스스로 터득하였는데, 천체가 운행하는 도수(度數)를 추산(推算)하여 이듬해의 역(曆)을 만들면 정확히 맞았다..

1679년(숙종 5) 3월 남인(南人)인 윤휴(尹鑴)·권대운(權大運) 등이 노론(老論)의 거두(巨頭)인 송시열(宋時烈)이 주장하는 예론(禮論)에 동조하는 소(疏)를 올린 송상민(宋尙敏)을 공격하여 죽였다. 이때 박세징은 송상민의 상소에 참여했다는 죄명으로 형신을 받고 평창(平昌)에 정배되었는데, 채 떠나기 전에 옥사에서 죽었다. 이때 나이 46세이었다.

성품과 일화

박세징은 지극한 성품과 순수한 행실이 있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농담을 한 적이 없으며, 일이 없을 때에는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고, 맛있는 것을 얻으면 먼저 입에 넣지 않았으며 남을 접대하면 반드시 정성으로 공경하였다고 한다.

그는 송상민의 소와 관련되자 벗에게 말하기를, “생과 사는 운명이며 오늘의 일은 본디 영예로운 일이건대, 다행히 두 어린 아이가 있으니 벗들이 잘 보살펴 주도록 하라.”하고, 끝내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으므로, 보는 사람이 탄복하였다. 이미 형장에 이르러서는 행동거지(擧止)가 조용하였고 신장(訊杖)을 맞으면서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고 한다.

송시열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아는 것이 높고 지키는 것이 바르고 수양이 깊은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충청도 회덕(懷德) 설랑리(雪朗里)의 선대 묘역에 있다. 송시열이 지은 묘지(墓誌)가 있다. 부인 변씨(邊氏)는 2남을 두었는데, 1자는 박정명(朴正命)이고, 2자는 박정경(朴正經)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