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태(朴慶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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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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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경태 |
한글표제 | 박경태 |
한자표제 | 朴慶泰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후기 |
왕대 | 숙종~영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운경(雲卿)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79년(숙종 5) |
본관 | 함양(咸陽) |
주거지 | 갑산(甲山), 서울 |
부 | 박석민(朴碩敏) |
형제 | (동생)박경홍(朴慶弘), 박경신(朴慶新),박경서(朴慶瑞),박경하(朴慶夏),박경훈(朴慶暈),박경래(朴慶來),박경휘(朴慶彙)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경태(朴慶泰) |
총론
[1679년(숙종 5)~ 미상].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 활동한 무신. 자는 운경(雲卿)이고,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아버지는 박석민(朴碩敏)이다.
숙종~영조 시대 활동
1715년(숙종 41년) 식년시(式年試) 무과(武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였다. 1728년(영조 4) 아오지만호(阿吾地萬戶)에 임명되어 부임하는 도중에 청주(淸州)에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만호의 관직을 우선 버려두고 이인좌 반란 토벌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도원수(都元帥)오명항(吳命恒)에게 가서 토벌군으로 종군할 것을 청하여 그의 휘하가 되었는데, 토벌군으로 출범하여 안성(安城)·죽산(竹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지갈파진 첨절제사(知乫坡鎭僉節制使)가 되었다. 동관 첨절제사(潼關僉節制使)·장기현감(長鬐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모 봉양을 이유로 사퇴했다. 뒤에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품계는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상지40년 을미식년 문무과방목(上之四十年乙未式年文武科榜目)』(숙종 40년)
- 『갑산읍지(甲山邑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