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가흥(朴可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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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47년(고려 충목왕 3)~1427년(세종 9) = 81세]. 고려 말 우왕~조선 초 세종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우의정(右議政)이다. 자는 안중(安中)이고,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아버지는 평원부원군(平原府院君)박천상(朴天祥)이다. 평양군(平陽君)의정부(議政府)지사(知事)박석명(朴錫命)가 그의 아들이다. 외손녀인 최사의(崔士儀)의 딸이 세종의 후궁이 되어 명의궁주(明懿宮主)로 봉해졌다.

고려 말 이초의 옥사

처음에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되었는데, 여러 번 천직되어 삼사 좌윤(三司左尹)·경상도안렴사로 임명되었다. 이어 밀직사(密直司) 우부대언(右副代言)에 발탁되고 예의판서(禮儀判書)로 천직되었다가 전법군부판서(典法軍簿判書)밀직부사(密直副使)로 옮겼다. 1388년(우왕 14) 이인임(李仁任)이 숙청당하여 경산부(京山府)에 유배되자 그에 연루되어 순천으로 귀양 갔다.

공민왕(恭愍王) 때 중낭장이초(李初)와 윤이(尹彝)가 명나라에 있으면서 명나라의 힘을 빌려 시중이성계(李成桂)를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 당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순안군(順安君)왕방(王昉)과 동지밀직사(同知密直事)조반(趙胖)이 돌아와 그 사실을 임금에게 알렸다. 1390년(공양왕 2)에 <이초의 옥사(獄事)>가 일어나 이색(李穡)·우현보(禹玄寶) 등 수십 명이 하옥되었다. 그는 연루된 김종연(金宗衍)을 숨겨주는 등, 이성계 제거에 협력하다가 붙잡혀 유배당했다.

조선 태종·세종 시대 활동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박가흥의 아들 박석명이 좌명(佐命)한 공으로 그의 재능을 알아 대우함이 특별히 융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박가흥은 공안부(恭安府)판사(判事)로 기용(起用)되고, 1404년(태종 4)에 개성유후(開城留後)가 되었다가 1414년(태종 14)에 검교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그 뒤 검교의정부 찬성(贊成)·우의정에 옮겨 치사(致仕)하였다. 1427년(세종 9) 8월 21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81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가흥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순후하여 부화(浮華)하지 않았으며, 침정(沈靜)하여 지조를 지키었다. 항상 글하는 선비들을 좇아 사귀었고, 시(詩)짓기와 술로써 스스로 즐겼다. 벼슬하여 일을 처리함에는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았고, 사람을 대할 때에는 오로지 사랑과 은혜 베풀기에 힘썼다.

묘소와 시호

시호는 정후(靖厚)이다. 묘소는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陶谷里)에 있다. 부인 정씨(鄭氏)는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정을보(鄭乙輔)의 딸이며, 아들 박석명을 두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