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巫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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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람들의 병을 다스리는 무격(巫覡)을 일컫는 말.

개설

예부터 무의(巫醫)는 무(巫)이면서 의(醫)의 직능을 발휘하는 특정한 존재였다. 의(醫)의 분화와 발전이 아직 활발하지 않은 고대 사회에서 무(巫)는 무술(巫術)을 통해 인간의 치병을 담당하는 직능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고, 무술로써 의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무의의 요법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의례적으로 통용되었다.

내용

『경국대전』이 간행될 당시만 하여도 의무(醫巫)의 역할이 법전에 명시될 정도로 무의는 대민 의료 체계에서 의료 인력의 보조자로서 중요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경국대전』「예전」의 ‘혜휼’조에는 "무릇 무격은 서울에서는 본조(本曹)가 장적(帳籍)에 기록하여 활인서에 분속시키고 지방에서는 본읍(本邑)이 장적(帳籍)에 기록하여 병든 사람을 치료하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조선전기에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무의(巫醫), 또는 의무 등의 용어가 폭넓게 사용되며, 무격의 적극적인 활인 활동을 강조하고 이들의 근태를 관리하는 대목이 보이고 있다.

이렇듯 사회적으로 공인된 분위기에서 질병의 빌미를 해소하기 위한 무(巫)의 염승법(厭勝法)은 공공연히 행해졌다. 1408년(태종 8) 4월 1일에는 망혼(亡魂)이 빌미가 되어 발병하였다는 무(巫)의 의견에 따라 망자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불태우는 사건도 있었다(『태종실록』 8년 4월 1일). 조선전기가 지나 유교적 질서가 자리 잡아 가면서 무업(巫業)에 대한 논란도 지속되었지만, 지속적으로 왕실로부터 사대부가와 민간에 이르기까지 치료를 행하는 데 우선시될 정도로 무격의 치병은 성행하였다.

대중에게 의술의 보급이 확산되어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된 조선중기 이후에도 무격의 의료적 직능에 의존하는 경향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민간의 치료적 전통으로 자리 잡아 왔던 것도 있었지만 대중에게 무엇보다 질병의 치료가 다급한 상황에서 의술과 무술의 선택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변천

조선전기 각 왕대에는 무격에 대한 의무(醫務)가 강조되었다. 이는 성종대에 편찬된 『경국대전』에서 역할을 규정하는 데 이르렀고, 『대전회통』까지도 무의의 역할은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격에 대한 유교 사회의 음사(淫祀) 논란은 이들의 역할에 잦은 제동을 걸었다. 이처럼 국가 차원의 무의 활동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무의의 치료적 직능이 동서활인서의 제도적 취지에 부응하였기에 무(巫)는 활인서에 소속될 수 있었지만, 거기에는 유교 사회가 안고 있는 대무(對巫) 정책의 한계도 잠재해 있었다. 무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유교 문화권 내에 소속시킴으로써 이들의 운신을 제한하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집단적인 질병이 확산되는 위기 상황에서는 무의 치료적 직능이 자연스럽게 요청되었지만 상황의 긴박성이 해소되었을 때에는 무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금압의 조처들이 강구되었다.

정조대에는 무격에 대한 금단 조처가 더욱 엄격화되어, 이제 무격은 오부(五部)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또한 오부에서는 이를 철저하게 적간(摘奸)하여 다달이 보고해야 했고, 이러한 직무를 게을리 하는 관리는 중죄로 처벌받게 되었다(『정조실록』 즉위년 9월 2일). 따라서 이후 동서활인서의 의무(醫巫) 활동은 중단되고 또 무세(巫稅)도 폐지됨으로써 활인서의 운영비로 조달되던 재원을 잃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하지만 공식적인 의무 활동을 제재하여 그들의 역할이 제한된 것으로 보일 뿐, 실제 왕실과 민간에서 행했던 무격에 대한 치료 의존도는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의의

무의의 존재와 역할은 고대 사회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형태로 존속하는 몇 안 되는 전통 중 하나일 것이다. 또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무업이나 무속만큼 새로운 사회적·정치적 기조에 의해 끊임없는 음사 시비의 대상이 되었던 예도 찾아보기 어렵다. 어느 국가나 민족을 막론하고 이와 같은 전통이 없지 않은데도 몇 가지 극단적인 사건을 이유로 유독 무속과 의무의 직능이 폄하되는 사실도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일이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임학성, 「조선시대의 무세제도와 그 실태」, 『역사민속학』3, 1993.
  • 최남선, 「살만교차기(薩滿敎箚記)」, 『계명』19, 1927.
  • 최종성, 「조선조 유교사회와 무속 국행의례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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