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리(水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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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궐에서 궁녀들의 심부름을 하던 계집종.

개설

무수리는 수사(水賜)·수사이(水賜伊)와 같은 말이며, 대전(大殿)과 동궁전(東宮殿) 등을 청소하고 세숫물을 준비하거나 그 외에 궁중에서 심부름을 하던 계집종을 가리킨다(『세종실록』 2년 9월 27일). 별칭으로 방자(房子)로 불리었고, 같은 직무를 행하였던 사내종은 파지(巴只)라고 하였다. 신분은 가난한 천민의 딸들이 많았으며, 각사에 소속된 공노비 중에서 되기도 하였다(『성종실록』 18년 1월 23일). 무수리를 수사라 하였기 때문에 궁궐 내에 있는 무수리들의 처소를 수사간(水賜間)이라 하였다.

담당 직무

무수리는 청소가 주된 직무로 기록되어 있다(『태종실록』 11년 윤12월 2일). 그러나 각 처소에 한두 명 정도 배정되어 청소는 물론 물 긷기, 불 때기, 세숫물 준비하기 등 각종 잡역(雜役)을 담당하였다. 주로 상궁과 나인의 허드렛일을 돕고 심부름을 하였다. 비슷한 일은 하던 계집종으로 방자 혹은 방자나인(房子內人)이 있었다. 이들은 각사에서 뽑혀 온 공노비였으며, 나인의 종이란 의미로 방자나인이라 불렸고 상궁의 살림집에서 가정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변천

고려시대의 제도를 조선에서 따른 것으로 무수리들은 본래 번갈아 출퇴근하였으나 궁궐의 말이 외부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궁궐 밖으로의 출입을 금하였다(『태종실록』 11년 윤12월 2일). 인원은 법제로 규정되어 있지 않으나 성종대에는 삼대비전(三大妃殿) 즉, 대왕대비 정희왕후, 왕대비 소혜왕후, 왕대비 안순왕후의 전각에서 시중드는 무수리의 수를 정하였다. 이때 대왕대비전은 무수리 6명에 방자 5명, 왕대비전은 무수리 5명에 방자 7명으로 정하였다(『성종실록』 1년 2월 6일).

무수리는 일본 제국에게 국권을 상실한 대한제국 말기에는 기혼자들이 많아서 출퇴근하였다고 하나, 이전에는 궁녀들과 마찬가지로 궁궐 내에서 혼인을 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므로 가뭄이 지속되면 음(陰)의 기운이 강하여 재앙이 지속된다는 유교적 재이관(災異觀)에 의해 궁녀와 함께 무수리를 궁궐 밖으로 내보내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8년 5월 28일). 그리고 이렇게 궁궐 밖으로 나간 궁녀와 무수리는 종친 및 조관(朝官)과 혼인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18년 1월 5일). 무수리들에게는 엄격한 생활이 요구되어 궁궐 내에서 절도를 범했을 경우 형조(刑曹)에서 장(杖) 60대를 때리고 자자(刺字)를 하여 궁궐 밖으로 내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1년 3월 24일).

비슷한 일을 하던 방자도 가뭄이 오래되면 궁궐 밖으로 나가도록 하였으며, 궁궐 밖으로 나간 방자들이 궁궐 내의 일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왕이 전교를 내리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8월 8일). 이는 방자가 여종이었기 때문에 심부름을 하며 매를 많이 맞았고, 이로 인해 원한을 품고 궁궐 내의 일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내려진 조처였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김용숙, 『조선조 궁중 풍속 연구』, 일지사, 1987.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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