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옥(巫蠱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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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년(숙종 27) 희빈장씨의 무고로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장씨를 자결케 한 사건.

개설

희빈장씨(禧嬪張氏)가 1701년 2월부터 취선당에 신당을 몰래 설치한 후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죽고 자신이 복위되기를 기도했는데, 8월에 인현왕후가 죽자 숙빈최씨(淑嬪崔氏)가 장씨의 무고(巫蠱) 사실을 숙종에게 알렸다. 숙종은 친국을 통해 설향·숙영 등의 자백을 받고 증거를 찾아내었으며, 장씨가 세자의 친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자결토록 하였다.

배경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현왕후가 복위(復位)되었지만, 궁중의 중심은 희빈장씨에게 기울어 있었다. 그러자 시녀들도 중궁전을 거리낌 없이 염탐했으며, 장씨도 인현왕후에게 문안하지 않고 ‘민씨(閔氏)’라고 부르는 등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 장씨는 1701년 2월 취선당(就善堂)에 신당(神堂)을 몰래 설치해 인현왕후가 죽고 자신이 복위되기를 기도했다. 같은 해 8월 14일 새벽 인현왕후가 창경궁(昌慶宮) 경춘전(景春殿)에서 죽자 숙빈최씨(淑嬪崔氏)가 장씨의 무고 사실을 숙종에게 알렸다.

발단

1701년 9월 23일 숙종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인현왕후에 대한 장씨의 무례함을 비판하면서 장씨의 오빠인 장희재(張希載)를 처형하고 장씨에게 자결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대해 최석정(崔錫鼎)·윤지인(尹趾仁) 등은 장씨와 장희재 처리에 대한 융통성을 보여 세자를 보호할 것을 상소했다. 특히 최석정은 세 차례나 차자(箚子)를 올려 장씨를 용서하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숙종은 직접 목격한 것임을 강조하며 장씨의 무례한 행동을 비판했고, 도리어 최석정을 진천현(鎭川縣)에 중도부처(中途付處)시켰다(『숙종실록』 27년 10월 1일).

경과

9월 26일에 숙종은 인정문 앞에서 설향(雪香)·숙영(淑英) 등을 친국(親鞫)했다. 이들은 취선당에 신당을 설치한 이유에 대해 인현왕후의 사망과 장씨의 중전 복위를 축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이들이 진술한 방재(龐災)의 정황에 따라 각씨(角氏)와 참새·쥐의 뼛가루 등의 물건을 대조전(大造殿)통명전(通明殿) 주변에서 찾아냈다. 이에 따라 숙영·오례 등은 참형되었고, 장씨는 자결하여 무고 사건은 일단락되었다(『숙종실록』 27년 10월 8일).

참고문헌

  •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성무·정만조 외, 『조선 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 이은순, 『조선 후기 당쟁사 연구』, 일조각, 1988.
  • 이희환, 『조선 후기 당쟁 연구』, 국학자료원, 1995.
  • 서영대, 「무고·저주」, 『한국무속학』4, 200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