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巫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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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자연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다른 사람을 해코지하는 흑주술(black magic)의 일종. 저주 또는 방자(方子)라고도 함.

개설

질병이나 불행을 저주의 탓으로 돌리는 믿음은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까닭에, 그 해결 방법도 민족이나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이를 조작적인 것과 무조작적인 것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조작적이란 일정한 의례적 행위를 통하여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이고, 무조작적이란 영력(靈力)을 타고난 사람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의례 없이 심령 작용만으로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을 말한다. 인류학에서는 전자를 ‘sorcery’, 후자를 ‘witchcraft’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무고(巫蠱)는 특별한 방법에 의거한다는 점에서 전자에 포함된다.

내용 및 특징

무고의 방법에도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 고(蠱)로 하여금 질병이나 재앙을 일으키도록 하는 방법이다. ‘고(蠱)’라는 글자는 그릇 속에 벌레가 여러 마리 함께 들어있는 형상이며, 그릇 속의 다른 벌레들을 잡아먹으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 벌레를 뜻한다. 따라서 이것은 곤충이나 파충류를 고로 만들고, 그 독을 이용하여 다른 사람을 해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은 한국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를 유괴하여 굶겨 죽이고 그 혼령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해치고 재물을 갈취하는 염매(魘魅)의 풍습이 있었다고 하는 바, 이 경우는 아이의 혼령이 고의 일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첫 번째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둘째, 흉측한 물건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사람이나 짐승의 시신 또는 뼈를 베개 속에 넣어둔다든지 왕래하는 길에 뿌려둔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때 흉측한 물건은 고(蠱)를 대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해치려는 사람의 대용물, 예컨대 인형이나 명패 같은 것에 해코지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유사한 행위를 하면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는 공감주술(homeopathic magic)의 원리에 입각한 저주라 할 수 있다.

넷째, 저주의 말을 퍼붓거나 주문을 외거나 부적을 사용하여 재앙을 주는 방법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 방법은 한국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변천

고(蠱)란 글자는 중국 갑골문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어,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 한국에서도 무고는 일찍부터 행해졌을 것으로 짐작되나,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1161년(고려 의종 15) 정서(鄭敍)의 처 임씨(任氏) 등의 국왕 저주 사건이며, 이후 원 간섭기에는 왕실을 중심으로 저주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1258년(고려 고종 45) 홍복원(洪福源)의 왕족 영령공(永寧公) 저주 사건, 1276년(고려 충렬왕 2) 충렬왕의 후궁 정화궁주(貞和宮主)의 제국대장공주 저주 사건, 1277년(고려 충렬왕 3) 원종의 계비 경창궁주(慶昌宮主)의 충렬왕 저주 사건, 1293년(고려 충렬왕 23) 궁인 무비(無比)의 제국대장공주 저주 사건, 1298년(고려 충선왕 즉위) 충선왕의 조비(趙妃)의 계국대장공주 저주 사건 등이 그것이다.

조선시대에도 왕실에서 무고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1530년(중종 25) 중종의 후궁 경빈박씨의 세자 저주 사건,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의 광해군 저주 사건, 1639년(인조 17) 인목대비의 딸 정명공주의 인조 저주 사건,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빈 강빈(姜嬪)의 인조 저주 사건, 1651년(효종 2) 인조의 후궁 조귀인(趙貴人)의 효종 저주 사건, 1701년(숙종 27) 장희빈의 인현왕후 저주 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상은 사건화되어 드러난 사실들이지만, 이밖에도 표면화되지 않는 많은 저주들이 행해졌을 것이다. 1652년(효종 3)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한 목적이 궁궐 곳곳에 감추어진 저주용 물건을 없애기 위해서였고, 실제로 수리 과정에서 저주에 사용된 물건들이 많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왕실 내에서 저주가 얼마나 성행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저주는 증오와 질투를 실력이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취하는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무고는 사회적 강자인 남성보다 여성들에 의해 선호되었고, 여성들 간의 인간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궁중에서부터 무고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증오와 질투는 궁중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고는 왕실에서부터 사대부 양반 가문을 거쳐 서민 사회에까지 널리 행해졌다. 을사사화 때 죽은 유관(柳灌)의 여종이 주인을 죽음으로 몰았던 정순붕(鄭順朋)에게 무고의 방법으로 원수를 갚았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무고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만큼 그 효력을 믿었던 전통시대에는 일종의 범죄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무고를 한 자에 대한 처벌 규정을 마련했으며, 고려나 조선에도 이를 준용하여 엄벌에 처하였다. 그리고 1371년(고려 공민왕 20) 사면령을 내릴 때도 무고 관련자는 제외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무고는 중죄로 취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고한 자를 처벌한다고 해서 저주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무고가 표면화되면 저주에 사용한 물건을 찾아내는 등 무고를 차단하거나 무효화하는 일이 필요한데, 무당이나 술사들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다.

의의

무고는 불법적으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어서, 드러내놓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은밀히 행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고가 사회적으로 표면화되는 것은 누군가의 고발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무고 문제를 고려할 때는 누가 무고를 했느냐에 못지않게 누가 고발을 했느냐 하는 점과 그 의도가 중요하다. 고발은 허위일 수 있으며, 누군가가 무고를 했다고 고발함으로써 오히려 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는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열거한 고려와 조선시대 왕실의 무고 사건은 대부분 날조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커다란 정치적 파장을 몰고 왔다. 충선왕 때 조비의 계국대장공주 저주 사건은 정치적 개혁을 단행하려던 충선왕의 실각을 가져왔으며, 숙종 때 장희빈의 저주 사건은 그녀의 죽음으로 이어지면서 이 과정에서 노·소론의 갈등을 야기하였다. 따라서 무고 사건은 한국 정치사 이해에도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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