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극(矛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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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의장용 병기인 모(矛)와 극(戟)을 아울러 이르는 말.

개설

원래 ‘모’는 긴 장대 끝에 고리 모양으로 휘어진 날이 달린 무기로, 적을 끌어당겨 베는 데 사용하였다. ‘극’은 끝이 세 갈래로 갈라진 긴 창으로, 적을 찔러서 살상하는 병기였다. 조선시대에는 통치자의 권력과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구일식의(救日食儀) 등의 군례에 이러한 모와 극을 의장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모는 구겸창(鉤鎌槍)이라고도 하는데, 보병이나 수병이 즐겨 사용하였다. 육전의 경우에는 적의 기병을 말에서 끌어내리거나 말의 다리를 베는 데 사용하였으며, 방패로 몸을 가린 적 보병을 걸어 당겨 베는 용도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농성전에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적을 베는 데 사용하였다. 수전의 경우에는 근접한 적을 찍어 배에서 끌어내리거나 물에 빠진 적을 베는 데, 또 적선의 돛 줄을 끊는 데도 사용하였다.

극은 삼지창(三枝槍)의 일종으로, 끝부분에 달린 여러 개의 예리한 창날로 적을 찔러 범위가 큰 여러 개의 상처를 동시에 입히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또 창날이 넓게 퍼져 있어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도 용이하였다. 그러나 갑주(甲冑)의 방호력이 증가하면서 실전에서는 찌르는 능력을 극대화한 창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 그에 따라 조선후기에는 왕이 행차할 때 동원되는 의물(儀物)인 용기(龍旗)나 둑기(纛旗)의 깃대로 활용되는 경우가 잦았다.

모와 극은 조선시대 군례 가운데 하나인 구일식의를 거행할 때 의장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전악서(典樂署)전악(典樂)근정전(勤政殿) 계단 위에 북[鼓] 3개를 설치하면, 그 뒤 병조(兵曹) 정랑(正郎)이 청색·적색·백색의 휘(麾) 3개를 북 안쪽에, 병기(兵器) 3개를 북의 바깥쪽에 진열하였다. 동쪽에는 청색고(靑色鼓)와 모, 남쪽에는 적색고(赤色鼓)와 극, 서쪽에는 백색고(白色鼓)와 월(鉞)을 두었다.

형태

『세종실록』 「오례」에서는 주로 중국 문헌을 인용하면서 모와 극을 설명하였다. 1474년(성종 5)에 편찬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의 「병기도설(兵器圖說)」에도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모와 극은 자루의 경우 나무로 만들었는데, 주사(朱沙)를 이용해 붉게 칠하거나 생옻과 숯으로 검게 칠하였다. 자루의 하단 끝부분은 모철(冒鐵)이라는 쇠로 덮어씌워 둥글고 뾰족하게 만들었다. 모철은 창을 지면에 세우기 위해 부착한 것이지만, 창날이 부러지면 이를 살상용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설문(說文)』에 따르면, 모는 옛날 병기인 추모(酋矛)를 가리킨다. 길이는 2장(丈)이며 코끼리 모양을 닮았는데, 병거(兵車)에 세웠다고 한다. 서씨(徐氏)라는 사람은 모는 구병(勾兵), 즉 굽은 병기라고 하였다. 『예서(禮書)』에서는, 모의 형상[爲器]이 위는 날카롭고 옆은 굽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위의 날카로움은 식물이 처음 날 때의 가시랭이[苗]를 본뜬 것이고, 옆이 굽음은 식물이 성장할 때의 구부러짐[勾]을 본뜬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세종 연간에 간행된 『운부군옥(韻府群玉)』에 따르면, 극은 삼지창 모양으로 전체 길이는 1장 6척, 너비는 1촌 반이다. 『주례(周禮)』의 「병기총도(兵器總圖)」에는, 가운데 있는 긴 창날인 원(援)의 길이는 7촌 5푼, 좌우로 뻗은 보조 창날인 호(胡)의 길이는 6촌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창날 아래 자루를 끼우는 부분인 내(內)의 길이는 4촌 5푼, 극의 자루인 비(柲)의 길이는 14척 8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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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