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기(理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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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에서 형이상의 도(道)로서 모든 사물을 낳은 리(理)와 형이하의 기(器)로서 모든 사물의 재료인 기(氣)를 아울러 이르는 말.

개설

리(理)는 형이상(形而上)의 도(道)로서 동정(動靜)이 없고 작위가 없는 원리이다. 즉 우주와 인간의 본체로 존재 원리이자 도덕 원리이다. 기(氣)는 형이하(形而下)의 기(器)로 동정이 있고 작위가 있어 유행하고 변화하는 우주의 현상적 존재이다. 성리학은 리와 기의 개념 및 관계를 통해 우주와 인생, 그리고 인간 사회의 질서 등을 정합적으로 전개하는 학문이다.

주희(朱熹)는 이 두 범주를 현상적 측면에서 보기도 하고 원리적 측면에서 보기도 하면서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一而二 二而一]’라는 틀을 가졌다. 이러한 논지를 통해 주희는 리와 기의 선후(先後)·체용(體用)·동정(動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리의 우위성(優位性)을 강조하였다.

조선의 학자들은 주희의 학설을 수용하지만, 리와 기의 ‘서로 분리되지 않음[不相離]’과 ‘서로 섞이지 않음[不相雜]’이라는 방식을 가지고 성리학을 심화시킨다. 학자들 가운데에는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측면을 더 강조하여 리와 기를 일원론적(一元論的)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고, 리와 기가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측면을 더 강조하여 리와 기를 이원론적(二元論的)으로 이해하는 학자도 있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은 성리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불교와 노장의 학문을 비판하였다. 이후 학문적으로 무극태극(無極太極)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이 논쟁은 리의 우위성(優位性)을 통해 성리학의 본체론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리와 기의 선후 문제 역시 논리와 가치적 측면에서 리가 기보다 앞선다는 논지를 전개하였다.

조선중기 학자들은 천명(天命)을 인간의 감정인 사단과 칠정을 리와 기로 전개하였다. 이 때 리와 기의 ‘서로 분리되지 않음[不相離]’과 ‘서로 섞이지 않음[不相雜]’이라는 방식을 원용하여 리기 관계를 전개하였다.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을 더 강조하여 리와 기에 대한 일원론적 이해 방식을 추구하는 학자들이 있고, 리와 기가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점을 더 강조하여 이원론적 이해 방식을 추구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조선시대 많은 학자들은 이와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시켜 나가면서 리기의 선후 문제, 심에 대한 리기론적 해석에 관심을 가졌다.

세조는 사관인 방귀원(房貴元)을 불러 리기의 선후에 대해 물었다. 방귀원이 하늘과 땅이 아직 구별되지 않았을 때를 캐내어 보면 리가 기보다 먼저이고, 음(陰)과 양(陽)이 이미 나누어지면 기가 리보다 먼저라고 하였는가 하면, 주서(注書)권율(權慄)은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으나 리가 있은 뒤에 기가 있으므로, 리가 기보다 먼저라는 것을 피력하였다(『세조실록』 11년 11월 2일). 세조는 또한 대책(對策)에 합격한 자들에게 리와 기의 선후 관계를 글제로 내고 이것을 강론하게 하고(『세조실록』 10년 7월 25일), 신하들과 리와 기의 선후를 치밀하게 논하면서 리가 기보다 먼저라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하였다. 특히 세조대에는 태극을 여러 선유들의 말을 반추하여 리·기·리기로 여기는 경향도 있었다(『세조실록』 12년 9월 2일). 성종은 기의 근원은 리라고 할 정도로 리의 우위성을 주장하였다.

명종대에는 구언(求言)의 교서를 내리면서 하늘과 사람은 서로 함께하는데 리와 기가 전혀 틈이 없어 정기와 요기가 작용하고 선과 악이 유대로 응한다는 논지를 전개하였다(『명종실록』 9년 6월 1일). 이언적의 아들 이전인이 부친이 지은 「진수팔규(進修八規)」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는 천지 가운데 있는 사람은 리기가 관통하고 있지만 왕이 백성과 만물의 주인임을 강조하면서 심의 탁한 기나 악을 변화시켜 중화(中和)의 경지에 나아가도록 하는 논지가 있었다(『명종실록』 21년 9월 4일).

선조대에는 선조가 기대승(奇大升)을 불러 『대학(大學)』을 설명하게 하였다. 기대승은 "명덕(明德)이란 것은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은 것이어서 허령불매(虛靈不昧)하고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어 모든 일에 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얻은 것은 누구나 부여받은 인(仁)·의(義)·예(禮)·지(智)의 성(性)이고, 허령불매한 것은 심(心)이며, 여러 가지 이치를 갖춘 것은 성(性)이며, 모든 일에 대응하는 것은 정(情)입니다. 심이란 성과 정을 통섭(統攝)하는 것으로, 리와 기가 합하여 마음이 된 것이지만, 리가 주체이고 기가 발하게 하기 때문에 간직하면 보존되고 놓아버리면 떠나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심을 리와 기의 통합으로 보았다(『선조실록』 즉위년 12월 9일). 선조대에는 이황(李滉)·성혼(成渾)·이이(李珥)의 리기에 대한 학문을 거론하며 문묘 종사에 상소하는 글이 많았다.

조선후기 학자들에 이르면 이황의 학문을 높이 추존하는 학자들과 이이의 학문을 추종하는 학자들이 정치적으로 대립하게 되면서, 학자들끼리 서로 지나치게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숙종실록』 3년 5월 14일). 박성의(朴性義) 등은 이황과 주자를 공격하고 비판한 이이를 무함하는 상소를 올렸다. 부응교(副應敎)송광연(宋光淵), 교리(校理)이돈(李墩) 등이 박성의 등의 상소 내용을 분변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박성의의 음험한 말은 익히 알고 있다고 하면서 죄를 더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숙종실록』 7년 9월 30일). 또 숙종이 왕세자와 강론하는 주강에 나아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강독하다가 리기설에 이르렀는데, 시강관민진형(閔震炯)이 이황의 설을 옳다고 하면서 이이를 심하게 배척하기도 하였으니, 두 학파가 상당히 대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숙종실록』 23년 10월 21일). 이러한 상황에서 숙종대에는 주희의 성리학에 대한 교조적 신봉에 가까운 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주희의 성리학에서 벗어나 경전에 대한 독자적 해석을 가하는 학자도 있었다. 당시 윤휴(尹鑴)가 유교 경전(經典)을 주희의 주석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하자, 송시열(宋時烈)은 주희의 성리학에서 벗어났다고 하여 사문난적이라고 평하였다(『숙종실록』 13년 2월 4일). 이후 박세당(朴世堂)은 『사변록(思辨錄)』을 지어 주희의 경전 해석을 비판하여 정계나 학계에 큰 물의를 일으켰지만 독자적인 주석을 통해 유학 경전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였다.

영조는 경현당에서 부제학서명응(徐命膺)과 함께 강하였다. 서명응은 마음의 허령(虛靈)을 리기로 해석하였는데, 허(虛)는 리에 속하고 영(靈)은 기에 속하기 때문에 천지 사이의 물건이 속이 빈[中虛] 것은 모두 신령한[靈] 것이니, 인심(人心)으로써 말하건대 밖은 둥글고 방촌(方寸)은 비었기 때문에 능히 허령한 것이라고 하였다(『영조실록』 36년 12월 2일).

정조는 주자학을 정학(正學)으로 내세우지만 학자들과 주자학을 비롯한 이이의 성리학을 이해하려 하였다. 정조는 『성학집요』에 수록된 『중용(中庸)』·『대학』 수장(首章)의 뜻을 논하였다. 이조 참의유언호(兪彦鎬)와 입직옥당(入直玉堂) 이헌경(李獻慶)·이유경(李儒慶) 등은 정조와 함께 『중용』 수장에 대한 집주(集註)에 "기에 의해 형체가 이루어지고 리도 또한 부여받는다."는 내용을 가지고 리기의 선후를 특별히 토론하였다. 유언호는 집주에서 이렇게 말했지만 기가 리보다 앞선다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정조는 "리와 기는 본디 서로 함께 붙어 다니는 것이지만, 원래 리가 없는 기가 없고 또 기가 없는 리가 없는 것이다."라고 하자, 이헌경은 "리가 없으면 기가 생겨날 길이 없고 기가 없으면 리가 붙어 있을 데가 없는 것이므로, 리와 기는 서로 다르지만 나누어서 둘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언호는 "리와 기는 서로 떠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또한 서로 혼합시킬 수도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리의 선차성을 주장하였다(『정조실록』 1년 1월 27일). 그 후 정조는 이문원(摛文院)에 행차하여 내각(內閣)의 여러 신하들과 『근사록(近思錄)』을 강하고 원자(元子) 사부 송환기(宋煥箕)와 검토관김근순(金近淳) 등과 『중용』을 강독하면서 리와 기의 ‘서로 분리되지 않음’과 ‘서로 섞이지 않음’이라는 방식을 원용하여 리기의 의미를 명확히 하였고, 또한 구(柩)와 혼백(魂帛)은 마치 리와 기를 혼합하여 하나로 여길 수도 없고 분리하여 둘로 만들 수 없다는 것까지도 논의하였다.

리기의 선후 문제에 관심을 가지며 강론한 것은 전반적으로 주희의 ‘리선기후’를 지지하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리와 기가 서로 분리되지 않는 점과 서로 섞이지 않는 점을 이론적으로 전개하면서 논리적으로 리의 선차성을 말하고 윤리 도덕적 가치의 측면에서 리의 우위성을 강조하는 경향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大濱晧 지음, 이형성 교주, 『범주로 보는 주자학』, 예문서원, 1997.
  • 윤사순, 『퇴계 이황의 철학』, 예문서원, 2013.
  • 윤사순, 『한국유학사』, 지식산업사, 2012.
  • 황의동, 『율곡사상의 체계적 이해』, 서광사, 1998.
  • 陳來, 『朱子哲學硏究』, 華東師範大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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