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찰리사(都察理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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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도찰리사 |
한글표제 | 도찰리사 |
한자표제 | 都察理使 |
하위어 | 찰리사(察理使) |
관련어 | 도안무찰리사(都安撫察理使) |
분야 | 정치/행정/관직·관품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말기∼조선초기 |
왕대 | 고려말기∼조선초기 |
집필자 | 윤훈표 |
관품 | 일~이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도찰리사(都察理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5년 8월 26일, 『태조실록』 6년 6월 28일, 『태조실록』 6년 12월 17일, 『태조실록』 7년 1월 7일, 『태조실록』 7년 3월 19일, 『태조실록』 7년 1월 7일, 『태조실록』 6년 12월 22일, 『태조실록』 7년 2월 3일, 『태종실록』 3년 8월 28일, 『태종실록』 5년 9월 22일, 『세종실록』 18년 윤6월 1일 |
고려말부터 조선초까지 외방에 파견되어 주로 군사 활동 등을 통괄적으로 감찰하던 관직.
개설
고려말 외적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이를 효율적으로 방어하고자 군사 지휘관이나 그들의 활동을 감찰하기 위해 여러 명칭의 사신이 외방에 파견되었다. 그중 하나가 도찰리사(都察理使)인데, 이 관직은 최고 지휘관 이하가 행한 모든 군사 활동, 즉 모든 장수들의 부지런함과 나태함, 군사들의 강함과 약함을 살펴 부진한 자들을 다스리는 등 군사에 관한 모든 활동을 통괄적으로 감찰하였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고려말의 도찰리사제를 계승하여 세종대까지 운영하였는데, 그 내용은 고려말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조선 때에는 도찰리사와 명칭과 기능이 비슷한 도안무찰리사(都按撫察里使)가 파견되기도 하였다.
담당 직무
고려말기에 이르러 왜구를 비롯한 외적의 침입이 격화되면서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다양한 명칭과 역할을 지닌 사신들이 외방에 빈번하게 파견되었다. 이들은 당시의 상황 때문에 군사 지휘관, 또는 그들의 활동을 감찰하기 위해 보내졌던 경우가 많았다. 그중의 하나가 도찰리사였다. 고려말에는 1383년(고려 우왕 9) 8월에 양광도로 나갔던 문달한(文達漢) 이외에는 도찰리사가 파견된 예가 보이지 않는다. 주로 찰리사라는 칭호를 띠었는데, 문달한은 당시 문하평리(門下評理)라는 종2품직에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도찰리사라는 칭호를 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에 수록된 문달한의 열전에는 문달한이 양광·경상도도체찰사(楊廣慶尙道都體察使)로 부임되어 나갈 때 왕으로부터 직접 받은 명령이 나온다. 장수들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과 군사들의 강약을 잘 살펴 만약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서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 그가 원수라면 수감시킨 다음에 명령을 기다릴 것이며 나머지는 모두 직접 처단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를 통해 도찰리사와 도체찰사가 동일하거나 매우 유사하였으며, 그 임무도 관할 지역 내 군사 활동 전반을 감찰하는 최고위직의 사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정기적으로 보내지 않았고 어떤 정해진 사안을 처리하고자 파견했던 것도 아닌 임시로 급작스럽게 외방으로 보낸 사신의 하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도찰리사는 계속해서 파견되었다. 1396년(태조 5) 왜구를 방어하라고 지시하며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이지(李至)를 충청도·전라도·경상도도찰리사로 보내고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이천우(李天祐)와 이귀철(李龜鐵)을 함께 보냈다(『태조실록』 5년 8월 26일). 1397년에는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김주(金湊)를 서북면도찰리사로 삼아 수륙(水陸)의 군병(軍兵)을 감독하여 왜적을 잡게 하고, 더불어 평양의 궁터를 살펴보게 하였다(『태조실록』 6년 6월 28일). 이처럼 조선에서는 고려말과 같이 중앙의 고위 관직자를 도찰리사로 임명하되 군사 활동에 대한 감찰을 위주로 하면서 그 외의 중요한 사안에 대해 파악해서 처리하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변천
1396년의 이지와 1397년의 김주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도찰리사의 파견 사례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김주의 후임으로 같은 해 12월에 문하시랑찬성사최영지(崔永沚)를 서북면도안무찰리사(西北面都安撫察理使)로 파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태조실록』 6년 12월 17일). 임명되었을 때의 직책과 파견 사유가 김주의 경우와 같았음에서 ‘도안무찰리사’는 정식 명칭이고 ‘도찰리사’는 약칭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영지는 곧바로 서북면도순문찰리사평양윤(西北面都巡問察理使平壤尹)으로 고쳐 제수되었는데(『태조실록』 7년 1월 7일), 이를 통해 도찰리사와의 관계를 좀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최영지를 서북면도순문사라고 칭하는 기록도 나오기 때문이다(『태조실록』 7년 3월 19일). 즉, 도순문찰리사, 곧 도순문사는 도의 지방 장관직인 데 반하여 도찰리사나 도안무찰리사는 외방을 순찰하는 사신의 성격이 강하였다. 최영지의 경우를 통해 추측해보면 사신을 보냈다가 그 도의 지방 장관으로 임명하는 예가 있었던 듯하다. 양자의 임무나 성격이 유사하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최영지와 같은 시기에 정도전이 동북면도선무찰리사(東北面都宣撫察理使)로 파견되었다(『태조실록』 7년 1월 7일). 명칭상으로는 도안무찰리사와 매우 유사하지만 정도전이 원래 파견되었을 당시의 정식 명칭은 동북면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였다(『태조실록』 6년 12월 22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칭호를 사용하였다(『태조실록』 7년 2월 3일). 이 도선무찰리사는 도안무찰리사와 함께 도찰리사의 또 다른 칭호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태종 때 들어와 동북면의 길주도(吉州道)에 도안무찰리사가 파견되었다(『태종실록』 3년 8월 28일). 이는 사신이 아닌 군사 및 행정 책임자였다. 그로 인해 주로 도안무사로 불렸다(『태종실록』 5년 9월 22일). 따라서 태조 때 최영지가 서북면도안무찰리사로 나갔던 것과는 성격에 차이가 있었다. 한편 세종 때인 1433년부터 일정 기간 도안무찰리사를 파견하여 평안도 군사를 전제(專制)하게 하고, 도절제사 이하로 하여금 그의 명령에 따르게 했던 적이 있었다(『세종실록』 18년 윤6월 1일). 오히려 이것이 태조 때 파견되었던 도찰리사와 유사했다. 그 이후 체찰사(體察使) 제도가 자리 잡았기 때문인지 도안무찰리사가 파견된 예도 보이지 않는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최정환, 『역주 『고려사』 백관지』, 경인문화사, 2006.
- 오종록, 「고려 후기의 군사 지휘 체제」, 『국사관논총』 24, 1991.
- 오종록, 「조선 초기 양계(兩界)의 군사 제도와 국방 체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