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고려후기~조선초기에 문하부(門下府)에 두었던 종1품 관직.

개설

고려시대 전기에는 문하성의 평장사(平章事)를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라고 불렀다. 1275년(고려 충렬왕 1)에 첨의부가 설치되면서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 또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불리다가, 1309년(고려 충선왕 1) 이후에는 첨의찬성사 명칭만이 사용되었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는 문종 때의 관제가 복구되면서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불렸다. 정원은 4명이었는데, 후에 문하찬성사에서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명칭이 바뀌었다. 문하시중·참지정사 등과 함께 의정 기능을 담당하였고, 상서육부(尙書六部)의 판사(判事)를 겸직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초기에 문하부가 유지되는 동안에는 그대로 지속되어 호조나 형조의 판사를 겸직하였다. 이후 1401년(태종 1)에 문하부가 혁파되면서 문하시랑찬성사는 의정부 찬성사로 바뀌었고, 이후 의정부의 좌·우참찬이 되었다.

담당 직무

문하시중·참지정사와 더불어 모든 관원에 관련된 사무를 맡아서 다스리는 등 의정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호조나 형조 등의 판사직을 겸직하며 육조(六曹)의 일을 주관하였다. 이 밖에도 군사 기관인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절제사(節制使)를 겸하기도 하였다(『태조실록』 7년 9월 1일).

변천

고려시대 후기인 1356년에 문종 때의 관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첨의찬성사가 문하찬성사로 개칭되었다. 이후 평장정사(平章政事)·첨의찬성사로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새로 제정된 관제에 따르면, 문하시랑찬성사는 문하부의 종1품 관직으로 정원은 2명이었다. 또한 동판사(同判事)의 직책을 갖고 도평의사사에 구성원으로 참여하였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00년(정종 2)에 도평의사사가 의정부로 개칭될 때 문하부의 명칭이 유지된 까닭에 문하시랑찬성사로 불렸지만, 1401년(태종 1)의 관제 개혁을 통해 문하부가 혁파되면서 의정부 찬성사로 변경되었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이때부터 문하시랑찬성사는 의정부의 직제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후 좌·우참찬으로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事)』
  • 『경국대전(經國大典)』
  • 박용운, 『고려시대 중서문하성재신 연구』, 일지사, 2000.
  • 정두희, 「조선건국초기 통치체제의 성립과정과 그 역사적 의미」, 『한국사연구』 67, 1989.
  • 한충희, 「조선초기 의정부당상관연구」, 『대구사학』 87, 2007.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