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포진(德浦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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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 통진부에 설치된 수군진.

개설

덕포진은 경기도 통진부(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설치된 수군진(水軍鎭)이다. 덕포가 한양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목이어서 조선 선조 때 이곳에 수군진이 창설되었다. 덕포진은 한때 폐진되었다가, 조선 현종 때 복설되었다. 덕포진은 강화도 인근 해역의 여러 수군진과 협력하여 한양을 방어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특히 덕포의 입지 조건이 전선(戰船)을 정박하기에 편리하여 유사시 방비에 유리하였다. 조선 숙종 때 덕포진성이 축조되고, 수군첨사가 파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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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경위 및 목적

덕포진의 설치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조선 광해군 때 사간원에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선조(宣祖) 때 강화도 덕포에 수군을 파견한 것은 필요해서 설치하였을 것인데, 어떤 수사(水使)가 함부로 수군진을 없애고 수군을 수영(水營)으로 이속시킨 일은 매우 잘못된 판단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다(『광해군일기』8년 5월 7일). 이로써 보건대, 덕포진은 조선 선조 때 신설되었다가, 한때 폐지된 듯하다.

그 후 조선 현종 때 강화도 방비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덕포진이 다시 설치되어 한양을 방어하는 데 주력하였다(『현종실록』10년 4월 23일).

조직 및 역할

덕포진은 1675년(숙종 1) 영의정 허적에 의해 수군진성을 축조하자고 제안되었다(『숙종실록』1년 4월 28일). 그리하여 1679년(숙종 5)에 강화의 광성보(廣城堡), 덕진진(德津鎭), 용두돈대(龍頭墩臺) 등지와 함께 수군진성이 축성되었다.

또한 덕포진은 선박을 정박하기에 편리하여 유사시 방어하기에 유리하였다. 그리하여 1682년(숙종 8)에 지사 김석주(金錫冑)가 강화도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덕포진을 주진(主鎭)으로 승격시키자고 제안하였다. 이후 조선 영조 때 덕포진은 통진(通津)·부평·양천·돌곶[石串] 등지와 함께 방어기능을 수행하였다(『영조실록』21년 3월 11일).

변천

덕포진 인근 해상에 우리나라 뱃길 가운데 가장 험로에 속하는 ‘손돌목’이 있다. 이곳에 16세기 수군진이 창설되었으나, 이후 소멸과 복설을 반복하였다. 덕포진은 19세기까지 수군첨사가 주둔하여 방어기능을 수행하였다.

19세기에 이양선이 출몰하자, 덕포진첨사가 출동하여 방어하였다. 즉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와 접전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 함대와 싸웠다(『고종실록』8년 6월 1일). 덕포진 터는 사적 제292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통진부지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