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흥산성(大興山城)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대흥산성 |
한글표제 | 대흥산성 |
한자표제 | 大興山城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노영구 |
장소 | 경기도 개풍군 |
관련 인물 | 유혁연(柳赫然), 허적(許積), 윤휴(尹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대흥산성(大興山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숙종실록』 1년 9월 18일, 『숙종실록』 2년 4월 25일, 『숙종실록』 2년 10월 3일, 『숙종실록』 6년 5월 8일, 『선조수정실록』 26년 2월 1일 |
경기도 개풍군의 천마산(天魔山)과 성거산(聖居山) 사이에 있는 대규모 석축 산성.
개설
17세기 후반 청나라의 대규모 내란인 이른바 삼번(三藩)의 난을 계기로 집권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허적과 윤휴 등이 중심이 되어 북벌 준비에 착수하게 된다. 특히 허적은 천마산 일대에 산성을 축조하고 이를 대흥산성으로 명명할 것을 건의하여 숙종의 허락을 받았다(『숙종실록』 1년 9월 18일). 당시 북벌 준비의 일환으로 군권을 통제하는 도체찰사부가 복구되었고 도성 주변의 방어체계 전반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다. 그 일환으로 개성 지역의 경우 개성 주변 주민의 피난을 위해 박연폭포가 있는 천마산 일대에 대한 축성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었다. 대흥산성은 개성 지역 방어와 함께 도체찰사부의 진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규모로 축성이 이루어졌다(『숙종실록』 2년 4월 25일).
위치 및 용도
대흥산성이 있는 개성 지역은 평양에서 한성으로 내려오는 의주대로가 지나가는 교통상의 요충이었다. 아울러 의주대로 이외에 평양에서 삼등(三登), 수안(遂安), 신계(新溪)를 지나는 내륙의 대로가 개성 앞 평산(平山)에서 합류하여 내려오는 등 평안도에서 한성으로 내려오는 대부분의 도로는 개성을 지나도록 하였다. 특히 평지에 위치한 평산에 비해 개성은 앞쪽에 높은 산악 지대가 가로로 펼쳐져 있어 다른 지역에 비해 방어에 매우 유리하였다. 이전까지 개성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주로 개성 북방의 협곡인 청석동(靑石洞)을 거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이괄(李适)의 난 당시 이괄의 부대가 청석동이 아닌 그 동쪽에 있는 산예(山猊) 지역으로 우회하여 개성을 통과한 이후 청석동이 아닌 주변 지역 방어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그중에서 우봉(牛峰), 토산(兎山)에서 개성으로 연결되는 통로와 평산에서 개성으로 연결되는 저탄(猪灘)·산예 통로에 대한 방어의 중요성이 커졌다. 대흥산성은 바로 개성의 주요 통로의 하나인 동쪽 접근로를 통제할 수 있는 천마산과 성거산을 둘러싸고 축조되어 군사적인 중요성이 매우 높았다.
아울러 개성은 인조대에 이르러 국왕이 직접 정벌에 나설 때 나아가는 지역으로 정해지기도 하는 등 조선후기 들어 개성의 군사적 중요성은 이전에 비해 더욱 높아졌다. 17세기 후반 숙종 즉위를 전후하여 삼번의 난으로 중국의 정세가 매우 유동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자 조선은 북벌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 준비의 일환으로 도체찰사부가 복구되고 그 진을 위한 거점의 필요성이 높았다. 이에 숙종 초 대흥산성 축조가 이루어졌다.
변천 및 현황
1676년(숙종 2) 4월 완성된 대흥산성의 수비 강화를 위해 개성, 풍덕, 금천, 평산, 배천, 연안 등 주변 고을에서 갓 과거에 합격한 자들을 모두 대흥산성에 배속시켰다. 이어서 방어에 필요한 각종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한성의 군기시(軍器寺)에 보관된 조총 등을 이곳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대흥산성에 필요한 군량 및 군졸의 확보를 위해 인근 지역에 둔전(屯田)을 설치하고 서흥, 수안, 곡산에 있는 둔전과 이천평강의 훈련도감 둔전도 도체찰사부로 옮기도록 하였다. 이들 둔전의 주민은 아병(牙兵)으로 편성하여 각 둔전의 별장(別將) 지휘하에 비상시에는 대흥산성에 들어가 방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 2년 10월 3일). 그 밖에 대흥산성 주변의 여러 요충지에도 관방(關防) 시설이 설치되면서 대흥산성은 개성과 황해도 남쪽 지방 군현의 핵심 방어 거점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남한산성에 비견될 정도로 정비되었던 대흥산성은 1680년(숙종 6) 남인의 실각으로 도체찰사부가 폐지됨에 따라 주관할 기관이 없어졌다. 대흥산성의 군량과 군기를 관리하기 위해 관리소(管理所)를 따로 설치하고 그 책임자로 당상관인 관리사(管理使)를 두었다(『숙종실록』 6년 5월 8일). 1682년에는 관리사마저 혁파하고 비변사의 당상관 1인이 대흥산성의 군량미와 포목 등을 직접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 조치로 대흥산성의 방어체계가 불가피하게 약화되자 개성 주변의 방어체계 전반을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1691년(숙종 17) 8월 「송도대흥산성조치절목(松都大興山城措置節目)」을 제정하여 대흥산성의 관리 책임을 개성유수에게 맡기고 비상시 개성의 주민을 거느리고 산성에 들어가 수비하거나 적군을 막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개성부 및 황해도 남부의 풍덕, 연안, 배천, 평산, 금천과 경기 북부의 적성, 삭녕, 마전, 연천 등 주변 고을의 출신을 모두 대흥산성에 소속시켜 유수군관(留守軍官)으로 편성하도록 하였다.
형태
대흥산성은 석축(石築)으로 축조되었는데 그 둘레가 5,997보(약 11㎞)에 달하며 1,530개소의 성첩(城堞)과 6개소의 성문을 갖춘 대형 산성이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임진왜란 중 행주산성에서 크게 승리한 권율(權慄)은 군진을 경기도 파주의 대흥산성으로 옮겨 일본군에 대비한 기록이 있으나 이는 개성의 대흥산성과는 다른 산성으로 보인다(『선조수정실록』 26년 2월 1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풍천유향(風泉遺響)』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노영구, 「조선후기 개성부 일대 관방체제의 정비와 재정의 추이」, 『한국문화』38,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