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사(大老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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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학자 송시열(宋時烈)을 제향하기 위해 여주에 건립한 사당.

개설

대로사는 1779년(정조 3) 정조가 여주 유생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건립한 송시열의 사당(祠堂)이다. 효종의 신하로서 충절을 바친 송시열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고, 정조는 ‘대로(大老)’라는 사액(賜額)을 내렸다. 또한 정조는 친히 대로사의 비명을 찬하여 거듭 특별한 은혜를 내렸다. 고종 연간 전국적으로 서원을 철폐할 때에도 존속하였고, 이름만 강한사(江漢祠)라 개칭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① 영당의 건립

효종이 북벌(北伐)을 추진할 때 송시열은 재야의 공론을 대표하는 산림(山林)으로 전면에 나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효종의 사망과 함께 북벌론이 중단되자, 송시열은 영릉(寧陵) 인근의 청심루(淸心樓)에 머물며 이루지 못한 북벌의 대의를 설파하며 효종을 그리워하는 글을 남겼다.

송시열의 이 같은 행적을 기리기 위해 1731년(영조 7) 노론계 신료인 정호(鄭澔)·민진원(閔鎭遠)·이재(李縡)·민우수(閔遇洙)가 앞장서서 여주의 선비들과 함께 2칸의 영당(影堂)을 짓고 송시열의 신주를 향사하였다. 하지만, 1741년(영조 17) 조정에서 전국적인 원사(院祠) 훼철을 단행할 때 철폐되었다[『정조실록』 3년 8월 6일].

② 대로사 건립 과정과 의미

1779년 정조는 여주에 세종의 능[[[영릉(英陵)]]]과 효종의 능[[[영릉(寧陵)]]]을 전알(展謁)하였다. 이때 정조는 청심루에 올라 송시열의 행적을 회상하였다. 또한 여주에 송시열의 사당을 건립해 주기를 청하는 경기도 유생 정운기(鄭雲紀) 등의 상소를 거론하며 특별히 요청을 윤허하였다.

당시 정조가 송시열을 제향하는 사당의 건립을 허락한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유생들이 함께 올린 상소[儒疏]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송시열은 효종의 신하로서 효종의 능침이 보이는 곳을 왕래하면서 신하로서의 예를 다했다. 정조 스스로 읊었던 송시열의 시 구절 “오래 앉아 달 지고 능의 송백 어두우니, 어느 곳에 꿇어앉아 말 아뢸지 몰라라[夜久月沈陵栢暗 不知何處跪陳辭]”는 이러한 정조의 뜻을 담고 있었다[『정조실록』 3년 8월 5일].

이 때문에 대로사는 이전에 송시열을 높이기 위해 건립한 사림 계열의 원사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정조는 선조(先朝)의 금령을 준수하며 즉위 이후 사림계의 사당 건립 요청을 허락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당시 대로사의 건립을 통해 정조는 송시열과 같은 신하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뜻을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다.

변천

1785년(정조 9) 송시열 사당에 대한 공역이 마무리되자, 정조는 친히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대로(大老)’라는 사액을 내렸다. ‘대로’ 두 글자는 송시열의 문집 가운데에 뛰어난 구절(句節)을 모아 편집한 『대로일고(大老逸稿)』의 제명에서 따왔다고 밝혔다(『정조실록』 9년 9월 5일)(『정조실록』 9년 9월 20일). 또한 1787년(정조 11)에 정조는 송시열 탄생 180주년을 맞이하여 자신이 찬한 대로사의 비명을 직접 써서 세우도록 하였다. 이때 비역(碑役)에 드는 비용으로 내수사(內需司)의 돈 1,000민(緡)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대로사에 연이어 특별한 은전을 내린 것이다(『정조실록』 11년 11월 9일).

이후에도 대로사에 대한 조정의 관심과 지원은 지속되었다. 1801년(순조 1) 대제학윤행임(尹行恁)의 주장을 따라 대로사의 제전(祭田)에 대해 면세를 윤허하였다[『순조실록』 1년 1월 29일]. 1871년(고종 10)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조치가 있었으나 이때에도 대로사는 존속하였다. 다만, 그 명칭을 ‘강한사’로 개칭하였다(『고종실록』 8년 3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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