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봉수(南山烽燧)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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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남산봉수 |
한글표제 | 남산봉수 |
한자표제 | 南山烽燧 |
상위어 | 봉수(烽燧) |
동의어 | 남산봉화(南山烽火), 목멱산봉수(木覓山烽燧) |
관련어 | 경봉수(京烽燧), 충순위군(忠順衛軍) |
분야 | 정치/군사·국방/통신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 연산군, 중종, 선조, 현종, 숙종, 정조, 고종 |
집필자 | 김주홍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남산봉수(南山烽燧)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5년 2월 26일, 『숙종실록』 27년 3월 8일, 『영조실록』 8년 9월 5일, 『정조실록』 7년 12월 5일, 『중종실록』 7년 7월 10일, 『선조실록』 36년 8월 30일, 『현종실록』 1년 7월 25일 |
조선시대 전국의 모든 봉수가 최종적으로 집결하던 경봉수(京烽燧)로, 오늘날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과 예장동의 남산 능선에 위치.
개설
남산봉수는 조선시대 병조의 관할이었는데, 그 실무는 무비사(武備司)에서 담당하였다. 세종대에는 거화 방법이 오거화제(五擧火制)로 확립되었고, 그에 따라 국경과 해안의 제일선 지역인 극변초면(極邊初面)의 봉수에서 이른 아침에 평안(平安)을 나타내는 1거의 거화가 오르면 차례로 정해진 봉수를 거쳐 당일 초저녁에 남산봉수에 도달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봉수는 조선을 개국한 뒤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시작된 도성(都城) 수축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다. 즉, 1423년(세종 5)에 병조와 진무소(鎭撫所)의 지휘 아래 남산에 올라 서로 바라보고 직접 거화하여 조준한 뒤에 땅을 측량하여 다섯 곳의 봉수를 설치하였다. 아울러 그 지명과 내력을 함께 기록하였다. 그에 따라 병조에서 남산에 봉수를 설치한 구체적인 과정과 장소가 자료로 남게 되었다.
제1봉수는 남산 동쪽 명철방(明哲坊)의 동원령(洞源嶺)에 설치했는데, 제1봉수로에 속하는 양주(楊州) 아차산봉화(峩嵯山烽火)와 연결되었다. 제2봉수는 성명방(誠明坊)의 동원령에 두었는데, 광주(廣州) 천천봉화(穿川烽火)와 연결되었다. 제3봉수는 훈도방(薰陶坊)의 동원령에 자리 잡았으며, 무악(毋岳) 동봉봉화(東峯烽火)와 연결되었다. 제4봉수는 명례방(明禮坊)의 동원령에 있었는데, 무악 서봉인 사봉봉화(四峯烽火)와 상응하였다. 제5봉수는 호현방(好賢坊)의 동원령에 설치했으며, 양주(楊州) 개화봉화(開和烽火)와 연결되었다. 이처럼 5개소의 봉수는 남산의 능선을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설치되었는데, 각각 소속된 방(防)이 다를 정도로 간격이 멀었다. 또한 각각의 봉수는 5개 노선과 하나씩 연결되었는데, 한성부에서는 각 봉수에 대(臺)를 쌓고 표(標)를 세워 대응하는 봉수와 봉화를 드는 식례(式例)를 기록하였다(『세종실록』 5년 2월 26일).
조직 및 역할
남산봉수는 위치상 한성부에서 관할하는 지역에 해당하였으나, 『경국대전』의 반포를 계기로 병조의 지휘 아래 무비사가 실무를 담당하였다. 남산의 각 봉수에는 봉수군 4명, 오원(五員) 2명씩 총 30명을 배치하였다. 다른 곳과 달리 남산의 봉수군은 오로지 후망(堠望)만 전담하였고, 다른 잡역은 면제되었다. 병조에서는 사람을 지정하여 봉수에서 망을 보게 하였고 다음 날 새벽에 승정원을 통해 이상 유무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만약 변고가 있으면 야간이라도 즉시 보고하였다. 그 뒤 남산의 봉수장(烽燧將)이었던 충순위군(忠順衛軍)이 혁파된 후에는 금군(禁軍) 중에서 녹봉이 후한 자가 돌아가며 수직(守直)하게 하였다. 목멱과 무악 두 산의 봉군 30호(戶)에는 호마다 보(保) 3명씩을 지급하여, 봉군 30호와 봉보 90명을 합친 총 120명이 24번(番)으로 나뉘어 5명이 매달 6일씩 교대로 입번케 하였다.
봉수에는 경계를 알리는 표지를 세우고 거짓으로 봉화를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이를 위반하면 군율(軍律)로써 엄히 다스렸는데, 간혹 참형하기도 하는 등 매우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 1701년(숙종 27) 남산봉수 주변에서 충청도 청산현의 기병 보인(保人)인 서일립(徐日立)과 최여상(崔余尙)이 억울한 일을 조정에 알리려 거짓 봉화를 올리자 금위영(禁衛營)에서 이들을 잡아다 효시(梟示)했다는 기록이 있다(『숙종실록』 27년 3월 8일). 1732년(영조 8)에는 좌·우포도대장과 종사관이 징계를 당하였는데, 남산봉수 아래에서 거짓으로 봉수를 올린 사람을 즉시 체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해당 봉수의 장졸 또한 업무를 소홀히 했다 하여 군율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영조실록』 8년 9월 5일). 그뿐 아니라 1783년(정조 7)에는 충청도 옥천의 정윤환(鄭潤煥)이 그의 할아버지인 정시웅(鄭時雄)이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군공을 세운 일을 왕에게 알릴 길이 없자 남산봉수의 연대 바로 옆에서 불을 피웠다. 형조에서는 이를 치죄하여 참수형에 처하였다(『정조실록』 7년 12월 5일).
조선시대 한양 남산에 위치한 5개소의 봉수에서는 매일 초저녁 변방의 안위를 전하는 봉수를 올리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국가를 운영하는 근간이자, 일반 백성들에 대한 경보(警報)의 기능도 갖추었음을 나타낸다. 만일 구름이 끼어서 봉수를 볼 수 없으면 즉시 병조에 보고해야 했다. 그러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봉수 운영의 관리 감독을 강화하고 철저히 운영할 것을 병조와 해당 관찰사 등에게 지시하였다.
1512년(중종 7)에는 변방에서 경보가 자주 오는데도 남산봉수는 매번 평안함을 보고하므로, 왕이 이를 의아하게 여겨 병조로 하여금 더 엄하게 살피도록 명하였다(『중종실록』 7년 7월 10일). 1603년(선조 36)에는 북도(北道)에 변란이 있었음에도 날씨가 흐리고 구름이 낀 것을 핑계로 거화(擧火)하지 않자, 북로(北路)의 각 고을을 차례로 살펴서 추고하여 엄중히 다스리게 하였다(『선조실록』 36년 8월 30일).
남산의 봉수는 평상시의 경우, 원래 다섯 곳의 봉수에서 각각 평안화 한 자루씩 총 다섯 개의 봉화가 올라야 했다. 그런데 북로에서 이어지는 제1봉수로의 전달처인 아차산봉화는 구름이 끼어 깜깜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남산봉수는 네 곳만 평안화를 올리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로 인한 사고도 있었다. 1660년(현종 1) 7월 24일에는 날씨가 맑은 덕분에 각 노선별로 봉화가 잘 전달되어 남산에 위치한 다섯 곳의 봉수에서 평안화 각 한 자루씩 총 다섯 자루의 봉화가 거화되었다. 하지만 남소(南所)의 부장(部將)은 이를 확인하지 않고 평소처럼 네 자루만 거화한 것으로 병조에 보고하였다. 마침 현종은 바로 전날에 날씨가 맑아서 다섯 자루가 모두 거화된 것을 직접 보았기에, 그 부장을 의금부에 하옥시켜 국문한 뒤 후일의 본보기로 삼도록 하였다(『현종실록』 1년 7월 25일).
한편, 남산봉수의 거화 모습은 조선시대 문인들에 의해 시(詩)의 소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멀리서 타오르는 봉화를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단상이나 평안에 대한 소망을 노래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시의 내용을 통해 봉수의 전달 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시간을 나타내는 시구(詩句)를 살펴보면, 각 도 극변초면의 연변봉수(沿邊烽燧)에서 이른 새벽에 오른 봉화가 대개 열두 시간 정도 지난 당일 초저녁 무렵에는 최종 도착지인 경봉수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세종대에 봉수제가 확립된 이후 고종대까지 남산봉수는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을 계기로 봉수제가 철폐되고, 이듬해 군부의 주청(奏請)에 의해 각지의 봉대와 봉수군이 폐지됨에 따라 남산봉수 역시 자연히 그 기능을 다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허백정집(虛白亭集)』卷1, 詩 烽火
- 『아계유고(鵝溪遺槀)』卷1, 箕城錄
- 『아계유고(鵝溪遺槀)』卷4, 雙門錄, 送南道柳兵使
- 『동악집(東岳集)』卷8, 萊山錄, 秋日夕 坐見城外南峯擧烽火而作
- 『택당집(澤堂集)』卷1, 詩, 烽火行 ;卷2, 詩 農兒生日悼念 十首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卷2, 暝吟
- 『월주집(月洲集)』卷1, 詩, 烽火
- 김주홍, 『조선시대 봉수연구』, 서경문화사, 2011.
- 남도영, 『한국마정사』, 한국마사회 마사박물관, 1996.
- 서울역사박물관, 『남산 봉수대지 지표조사 보고서』, 서울역사박물관,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