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생역(樂生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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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낙생역 |
한글표제 | 낙생역 |
한자표제 | 樂生驛 |
상위어 | 양재도(良才道), 영화도(迎華道) |
동의어 | 돌마역(突馬驛) |
관련어 | 속역(屬驛), 정역찰방(程驛察訪), 역노비(驛奴婢), 주정소(晝停所), 광주목(廣州牧), 전운노비(轉運奴婢) |
분야 | 경제/교통/육운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朝鮮) |
집필자 | 이승민 |
폐지 시기 | 1896년(건양 1) 1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낙생역(樂生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6년 2월 5일 |
조선시대 경기도의 도로망인 양재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위치했음.
개설
고려시대에는 성종에서 문종 연간에 역을 매개로 한 교통로인 역로(驛路)를 22역도(驛道)-525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하였다. 이때 낙생역(樂生驛)은 광주도(廣州道) 광주(廣州)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당시 이름은 안업(安業)이었다. 조선초기 세종대의 44역도-537속역 체제에서는 좌도충청도정역찰방 관할이었다가, 세조대에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되면서 양재도(良才道)에 소속되었다. 그 뒤 정조대에 양재도가 영화도(迎華道)로 개칭되면서 영화도에 속한 역으로 확립되어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낙생역은 고려시대부터 경기도 광주 지역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당시의 이름은 안업이었으며, 광주도에 속한 15개소의 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설치 시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고려의 역제(驛制)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된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067년(고려 문종 21) 사이에 광주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는 세종대에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을 갖추는 과정에서 좌도충청도 정역찰방(程驛察訪)이 관할하는 역 중의 하나가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광주목 편에 따르면, 역마 5필과 역노비 4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에 비해 『화성지(華城志)』에는 역마의 수가 3필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낙생역은 도성의 양재역에서 남양 해문역(海門驛)에 이르는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특히 양재역과 낙생역을 잇는 길은 한양과 동래를 연결하는 제4대로에 위치하였는데, 제4대로는 하삼도(下三道)의 진상품이 올라오고 일본 사신이 왕래하는 주요 대로 중 하나였다. 한편 양재역과 낙생역은 태종에서 성종 연간에 왕이 강무(講武)를 행하거나,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英陵)을 참배할 때 낮수라를 먹는 장소인 주정소(晝停所)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변천
1460년(세조 6)에 경기도와 하삼도의 역을 정비하면서 여러 역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려 도를 나누었는데, 이때 낙생역을 비롯한 경기도의 23개 역이 경기좌도찰방의 관할이 되었다(『세조실록』 6년 2월 5일). 이후 성종 연간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경기좌도가 양재도로 개편됨에 따라 낙생역은 양재도에 속하게 되었고, 1796년(정조 20)에 양재도가 다시 영화도로 개편되면서 낙생역 또한 영화도 관할로 바뀌게 되었다. 그 뒤 1896년(건양 1)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낙생역은 일찍부터 왕이 강무를 행하거나 영릉을 참배할 때 이용한 주요 역 가운데 하나였으며, 일본 사신이 상경하던 사행로에 위치해 있었다. 그 때문에 각종 역역(驛役)이 과다해지자 역민이 부족해 역이 쇠퇴해졌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하삼도의 백성 228명을 이주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또 1424년(세종 6) 3월에는 정역(丁役) 1명과 봉족(奉足) 2명을 1호(戶)로 묶는 삼정일호(三丁一戶)의 편호 방침에 따라 낙생역을 비롯한 양재도의 9개 역에 각각 10호씩 모두 270명의 전운노비(轉運奴婢)를 분급하였다. 그럼에도 중종대 이후에 역이 퇴락하자, 역마의 남승(濫乘)을 억제하고 하삼도의 역자(驛子)를 입거(入居)시킬 뿐 아니라 진상 물품을 참선(站船)을 이용해 수로로 운송하는 등 낙생역을 회복시키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역마 5필과 역노비 4명이 배속되어 있다는 『여지도서』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낙생역은 조선초기에 비해 매우 쇠퇴해졌다.
한편 낙생역은 『여지도서』에는 돌마역(突馬驛)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다른 자료들에는 모두 낙생역으로 되어 있다. 역이 이설되면서 역명이 혼용되었거나, 혹은 중간에 잠시 이름이 바뀌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낙생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와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광주부 남쪽 30리,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와 『광주부읍지(廣州府邑誌)』에는 광주부 남쪽 40리 지점으로 되어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중추원역원조사표」에는 광주부 관아 남쪽 45리 지점인 광주부 낙생면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의 위치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일대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여지도서(輿地圖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
- 『화성지(華城志)』
- 『광주부읍지(廣州府邑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