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儺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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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나례에서 벌이는 놀이와 재주.

개설

조선시대까지 나례는 제석에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복을 부르기 위해 치러지거나, 왕이 출궁하고 환궁할 때 나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채붕(綵棚)을 치고 나례를 벌였으며,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에도 비슷한 이유로 나례 의식을 행하였다.

내용 및 특징

나례희가 벌어졌을 때에는 산대(山臺)를 놓고 그 위에 채붕을 친 가설무대에서 각종 놀이와 재주가 펼쳐진다. 이를 위해 각 지방의 재인(才人)들이 서울로 올라와 연희를 펼치는데, 그들이 했던 연희의 종목은 대체로 『문종실록』에 보이는 것처럼 광대(廣大), 서인(西人), 주질(注叱), 농령(弄鈴), 근두(斤頭), 수척(水尺), 승광대(僧廣大), 악공의 음악 등이다. 이 중 광대와 서인, 주질, 농령은 신라의 향악(鄕樂)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먼저, 광대는 대면(大面)이라고도 하며, 큰 탈을 쓰고 노는 탈놀음이다. 최치원은 시 「대면」에서 “누런 금빛 가면을 쓴 사람이 / 방울 달린 채찍을 들고 귀신을 쫓는다. / 빠른 걸음 느린 가락에 우아한 춤을 추니 / 봄날에 봉황이 춤추는 듯하다.”고 적고 있다. 가면을 쓴 두 사람이 가면무를 추는 모습을 적어놓은 것이다. 전통적으로 조선인들은 가면을 쓰면 귀신을 부르거나 다른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탈이나 가면은 아무나 쓰는 물건이 아니었으며, 탈놀음을 하는 집단인 대광대패나 광대패, 그리고 창우 집단 중 탈놀음을 하는 광대를 두어 일반인과 구별했다.

서인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서쪽 지방의 사람’이라는 의미로 볼 때 최치원의 시 「속독(束毒)」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 시는 “봉두남면이인간(蓬頭藍面異人間) 압대래정학무란(押隊來庭學舞鸞) 타고동동풍슬슬(打鼓冬冬風瑟瑟) 남분화약야무단(南奔化躍也無端)”이라는 7언 절구로 되어 있는데, “쑥대머리 파란 얼굴 저것 좀 보게 / 짝 더불어 뜰에 와서 원앙춤 추네 / 장구소리 두둥둥둥 바람 살랑랑 / 사뿐사뿐 요리 뛰고 저리 뛰노나.”로 번역된다. 속독은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와 사마르칸트 일대의 소그드(Soghd, [粟特]) 여러 나라에서 전래한 놀이이다. 이 지방 사람들이 동양인과는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어 쑥대머리의 파란 얼굴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주질은 주지(注之)라고도 한다.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 사자탈을 쓰고 추는 사자무를 의미한다. 사자춤은 최치원의 시 「산예(狻猊)」에서 확인된다. 그 시는 “원섭유사만리래(遠涉流沙萬里來) 모의파진착진애(毛衣破盡着塵埃) 요두도미인덕순(搖頭掉尾仁德馴) 웅기령동백수재(雄氣寧同百獸才)”로 된 7언 절구이며, “일만리 유사를 건너왔기에 / 누런 털은 빠지고 먼지는 뿌옇다. / 몸에 배인 착한 덕에 머리와 꼬리를 흔들고 노니 / 온갖 짐승 재주 좋다하나 이와 같으랴.”의 의미를 갖는다.

농령은 구슬이나 공을 가지고 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구슬 던지기 정도에 해당한다. 농령은 농환(弄丸)이라고도 하며, 최치원의 시 「금환(金丸)」과 관련이 있다. 다음으로 근두는 곤두라고도 하며, 땅재주를 말한다. 즉, 공중제비를 돌거나 물구나무를 서면서 재주를 피우는 것으로, 나무에 줄을 걸어 재주를 부리는 줄놀음과 비견된다.

수척은 고리버들을 짜던 천인인 양수척을 말하는데, 『문종실록』에 “광대·서인·주질·농령·근두 등과 같은 규식(規式)이 있는 유희는 예전대로 하고, 수척·승광대 등과 같은 웃고 희학하는 놀이는 늘여 세워서 수만 채우는 것이 가하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문종실록』 즉위년 6월 10일) 수척과 승광대는 골계(滑稽)적인 말로써 사람들을 웃기는 소학지희(笑謔之戱)를 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나례의 종목은 다음의 두 기록을 통해서도 찾아볼 수 있다.

먼저 1488년(성종 19) 3월에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서 평양, 황주, 서울의 광화문에서 본 나희의 내용을 적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토화(吐火), 만연어용지희(曼衍魚龍之戱), 무동(舞童), 곤두[筋頭], 줄타기, 죽광대(竹廣大) 등의 백희와 사자, 코끼리와 같은 가상(假像)의 진열(陳列)이었다. 그리고 성현의 『허백당집』에 보이는 「관나시(觀儺詩)」에서는 채붕을 시설하고 화려한 옷을 입은 무용수가 종횡으로 난무하고 농환, 줄타기[步索], 괴뢰무(傀儡舞), 장간희(長竿戱) 등을 나례의 놀이로 읊고 있다. 여기에서 토화는 불을 입으로 삼키거나 불을 뿜는 재주이며, 죽광대는 장간희와 같이 죽마(竹馬)놀이를 하면서 공 던지기 재주를 부리는 것이다.

이를 보면, 나례의 종목인 나희는 사람들을 말로 웃기는 소학지희와 눈요깃거리인 잡상(雜像), 그리고 광대나 재인들이 몸으로 기이한 재주를 보여주는 놀이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변천

국가적인 의식으로 치러지던 나례는 후대로 갈수록 점점 축소되면서 국가 의식에서 마을 축제로 바뀌었고, 조선말기 민간의 공연 문화로 발달하였다.

의의

나례는 벽사구복의 의미로 행해졌으나, 조선중기 이후 유교 문화가 사회 전반에 만연하면서 공식적인 공연 문화로서는 자리를 마감하였다. 그러나 나례에서의 광대 소학지희나 여러 공연 전통들은 조선후기 민간의 공연 문화 발달에 기여하였으며, 훌륭한 민속 유산으로 현재까지 전해진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악지(樂志)」
  • 『허백당집(虛百堂集)』
  • 이두현, 『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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