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전장(螺鈿匠)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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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나전장 |
한글표제 | 나전장 |
한자표제 | 螺鈿匠 |
대역어 | 자개박이, 자개장 |
상위어 | 경공장(京工匠), 공장(工匠), 관장(官匠), 외공장(外工匠), 장인(匠人) |
관련어 | 나전칠기(螺鈿漆器), 소목장(小木匠), 칠기(漆器), 칠장(漆匠) |
분야 | 정치/행정/관속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 조선 |
왕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최영숙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나전장(螺鈿匠)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7년 4월 28일, 『세종실록』 12년 2월 26일, 『단종실록』 즉위년 9월 1일, 『영조실록』 33년 6월 20일, 『연산군일기』 11년 1월 20일, 『연산군일기』 11년 7월 18일 |
조개껍질로 만든 나전(螺鈿)으로 칠기(漆器) 표면을 장식하여 나전칠기(螺鈿漆器)를 만드는 장인.
개설
우리말로는 자개, 자개박이라고 한다. 나전은 진주조개나 야광조개, 전복 등 조개껍데기를 가공해서 만든 패각(貝殼)이나 그 패각으로 기물의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을 말한다. 나전 기법은 옻칠을 한 칠기 표면을 장식하는 기법이기 때문에 보통 나전칠기 기법이라고도 한다. 나전칠기는 칠기 문화의 핵심으로 지금까지도 우리 민족이 만든 최고급 목공예품이자 특산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나전장(螺鈿匠)은 조선후기에 나전칠기가 대중화되기 전까지는 관장(官匠)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며, 소목장(小木匠)·칠장(漆匠)과 분업으로 나전칠기를 제작하였다.
담당 직무
조선후기에 관장제도(官匠制度)가 붕괴되기 전까지 나전장은 관장으로서 공조(工曹)와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왕실과 국가에 필요한 나전칠기들을 제작하였다. 나전장은 나무 기물을 만드는 소목장과 기물에 옻칠을 하는 칠장과 함께 분업 형태로 나전칠기를 제작하였다. 그런데 기록에는 공조에 칠장이 10명, 나전장이 2명 배치되어 칠장에 비해 나전장의 인원이 훨씬 적었다. 이는 고급 도료로서 관수품(官需品)이었던 옻칠이 다양한 용도로 쓰인 데 비해 나전은 매우 제한적으로 쓰였던 공예 재료였음을 의미한다. 즉 나전칠기의 재료인 자개를 비롯하여 거북이 등껍질을 가공한 대모전(玳瑁鈿) 등이 옻칠보다도 더 사치스럽고 귀한 고급 재료였던 것이다.
세종대에는 부족한 나전장을 구하기 위해 양인(良人)과 사천(私賤)뿐 아니라 각 관청의 노자(奴子)들을 훈련시켜 보충하고자 했던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 나전장의 수급이 어려웠던 것을 알 수 있다(『세종실록』 7년 4월 28일).
조선중기까지 나전칠기는 왕실이나 귀족, 사대부, 사찰 등 특별한 계층의 수요에 따라 제작되었던 최고급 공예품이자 사치품이었다. 나전칠기가 최고급 공예품이었다는 것은 나전경함(螺鈿經函)이나 나전소함(螺鈿梳函), 나전함(螺鈿函)과 같은 나전칠기들이 나라의 특산물로서 조공품(朝貢品)이나 중국, 일본 등과의 교역품으로 이용되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명(明)이나 왜(倭)로 보내는 진헌품(進獻品)이나 하사품(下賜品)에 나전소함과 같은 나전칠기들이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세종대에는 명의 황태후에게 보낸 진헌물에 나전소함이 포함되어 있다(『세종실록』 12년 2월 26일). 또 대한제국기까지도 일본을 비롯한 각 나라의 인사들에게 선물하거나 하사한 품목 중에도 나전 기물이 포함되어 있다.
나전칠기는 명기(明器)로도 사용되었다(『단종실록』 즉위년 9월 1일). 영조가 명기로 나전소함과 같은 사치스런 물건을 쓰지 말도록 금령을 내린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까지도 나전칠기가 귀한 사치재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영조실록』 33년 6월 20일).
연산군 때는 왕실에 나전함 1백 50부(部)를 만들어 들이게 하였다가 늦어짐에 따라 공조 관원을 국문한 사실에서도 나전칠기에 대한 왕실의 수요와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20일), (『연산군일기』 11년 7월 18일).
변천
목칠문화(木漆文化) 전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나전 기법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고려시대에 획기적으로 발달하였다. 고려시대 나전장은 경공장으로서 왕실 기물의 수급을 담당하는 중상서(中尙署)에 소속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나전 기물들을 제작하였다. 고려시대 나전칠기의 우수성에 대한 기록은 『고려도경(高麗圖經)』을 비롯한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발전하였는데 민간에까지 대중화되어 대량으로 제작된 것은 조선후기에 들어와서이다. 조선시대 나전장은 공조와 상의원에 소속된 경공장과 외공장(外工匠)으로서 활동하였으며 관장 제도가 붕괴된 이후에는 사장(私匠)으로서 전통을 이어나갔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경국대전(經國大典)』
- 『고려도경(高麗圖經)』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칠기 2000년』, 국립민속박물관, 1989.
- 국립중앙박물관 편, 『천년을 이어 온 빛 나전칠기』, 국립중앙박물관, 2006.
- 이종석, 『한국의 목공예』, 열화당, 1986.
- 이종석, 『한국의 전통공예』, 열화당, 1994.
- 정해조, 『중요무형문화재 10호- 나전장』, 민속원, 2006.
- 이난희, 「조선시대의 나전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 최영숙, 「고려시대 나전칠기 연구」, 『미술사연구』 15호, 미술사연구회, 200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