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풍(觀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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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상태를 살펴 정치의 득실을 파악하는 일.

개설

관풍(觀風)은 관풍찰속(觀風察俗)과 동일한 의미로, 민간에서 유행하는 노래[詩]를 통해 정치의 득실을 살피는 일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지방관인 ‘관찰사’라는 명칭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이는 민간의 노래가 갖는 정치적 효용성과 관련이 깊다. 정치의 득실이나 사회의 명암은 자연히 백성들의 노래에 나타나기 때문에, 민간에서 유행하는 노래를 바탕으로 민정을 살피고 정치의 득실을 파악하려 한 것이다.

내용 및 특징

문학 중에서도 시가를 통해 정치의 득실을 파악하려는 노력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예기』에서는 "태사에게 명하여 시를 진설(陳設)하고 민풍을 본다[命太師 陳詩以觀民風]"고 하였고, 그 소(疏)에서 "그 국풍(國風)의 시를 각기 진설하여 정령의 선악을 본다[各陳其國風之詩 以觀其政令之善惡]"고 하여 이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정치적 득실을 살피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이를 위해 민간에 유행하는 노래를 모으는 일을 채시(采詩)라 하고 이 일을 담당한 관리를 채시관(采詩官)이라 했다. 『한서』에 "옛날 국왕이 채시의 관리를 두고 민간의 풍속과 정치의 득실을 살펴 스스로 바로잡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관풍과 관련해 『예기』 에서는 잘 다스려지는 시대는 정치가 조화롭기 때문에 소리가 평안하고 즐거운 반면, 어지러운 시대는 정치가 어지러운 까닭에 백성이 괴로워서 소리가 원망스럽고 노엽다고 하였다. 시가 정치의 득실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것이다.

조선에서도 관풍이 제도화되어 있었는데, 세종 때에는 채시지법(採詩之法)에 의거해 각 지방의 노래를 활발히 수집했고(『세종실록』 15년 9월 12일), 세조 역시 관풍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세조실록』 11년 9월 13일). 관찰사들도 이 임무를 매우 중시하였다. 예컨대 강원도관찰사김자행(金自行)이 관풍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보인다(『성종실록』 7년 3월 15일).

채시의 방법은 『한서』「식화지」에 나와 있다. 정월이 되어 한곳에 모여 살던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려고 흩어지면, 행인이 목탁을 흔들며 마을의 길을 돌아다니면서 시를 모아 태사에게 바치고, 태사가 그 시의 음률을 맞추어 천자에게 알렸다.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라고 할 수 있는 『시경』 역시 ‘채시를 통한 관풍’이라는 목적에 따라 편찬되었다. 주희는 「시경집전서(詩經集傳序)」에서 "열국의 시에 이르러서는 천자가 순수(巡狩)할 때에 또한 반드시 시를 받쳤고, 천자는 이를 보고서 출척(黜陟)의 법을 행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시경』의 국풍과 관련된 언급이다. 『시경』의 국풍은 주나라 때 민간에서 유행하던 가요를 채집하여 정리한 것이다. 공자는 이를 통해 선을 권장하고 악을 징계했다. 그 때문에 음풍(淫風)도 채시의 대상이 되었다.

민간에 유행하는 시가를 채집한 것은 민정을 살피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위정(爲政)과 목민(牧民)의 도리를 마련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좋은 시가를 널리 보급해 민간의 성정을 온유하고 돈후하게 하려는 의도도 내재되어 있었다. 결국 위정자는 관풍을 통해 정치의 득실을 파악하고 이를 자기반성의 계기로 삼았으므로, 관풍은 시가의 정치적 효용론에 입각한 정치 형태로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시경(詩經)』
  • 『예기(禮記)』「왕제(王制)」; 「악기(樂記)」
  •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 「식화지(食貨志)」
  • 민병수, 『韓國漢文學槪論』, 태학사, 1996.
  • 최재혁, 『중국고전문학이론』, 역락, 2005.
  •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 漢語大詞典出版社,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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