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마배(牽馬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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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복시(司僕寺)에 소속되어 왕과 문무관 등이 탄 말이나 당나귀를 끈 마부.

개설

말구종[馬驅從] 또는 배종(陪從)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여마(輿馬)·구목(廐牧) 및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사복시에 소속되어 왕·세자·군 등의 경마를 잡았다. 경마란 남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 말을 모는 일, 또는 그 고삐를 가리키는데, 견마(牽馬)는 이 경마의 음을 딴 것이다. 사복시에는 하급 이속(吏屬)으로 서리(書吏) 15명, 제원(諸員) 600명, 차비노(差備奴) 14명, 근수노(塊隨奴) 8명, 이마(理馬) 4명, 견마배(牽馬陪) 11명, 고직(庫直) 4명, 대청직(大廳直) 1명, 사령(使令) 11명, 군사(軍士) 2명이 배정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견마배는 단종 때 체아직(遞兒職)이나 대장직(隊長職)을 받기도 하였으며, 중종 때는 잡직(雜職) 종7품을 받았다. 조선후기 『속대전』에서 사복시 소속 잡직으로 종7품의 견마배 11명이 규정되었고, 『대전통편』 단계에서 10명이 추가로 배정되었다.

담당 직무

견마배는 사신의 수행원으로서 일하기도 하고, 왕이 사냥 훈련인 강무(講武)를 행할 때나 지방으로 거둥할 때 마필을 끌면서 어가를 호위하기도 하였다. 견마는 왕과 문무관에게만 허용되었으나, 나중에는 민간에서도 성행하여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양반이 출입할 때는 반드시 과하마(果下馬)라도 타고 견마를 잡혀야 체면치레가 되었다고 한다.

1467년(세조 13)에는 개성 출신의 강호생(姜好生)이 유화(油靴)를 신고 근정전에 기어 올라가 비둘기 한 쌍을 잡아 용맹을 과시함으로써 견마배에 뽑혔다. 1592년(선조 25)에는 왕을 잘 호종한 공을 인정받아 견마배 이춘국(李春國)이 서반 관직을 받았고, 1593년(선조 26)에는 견마배 최국(崔國)이 수문장직에 제수되었다.

한편 견마배는 왕이 궁궐 밖으로 거둥할 때, 상소하는 사람들의 소장(訴狀)을 뇌물을 받고 미리 갖고 있다가 소장을 받으라는 명이 떨어지면 소매 속에 감춘 것을 왕에게 바치는 폐단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또 왕이 말을 타고 갈 때 어마의 재갈이 벗겨져 말이 멈추면 죄를 묻는[推考] 경우도 있어서 견마배의 근무 강도는 매우 강했다.

참고문헌

  • 『대전회통(大典會通)』
  • 한국학중앙연구원, 『관직명사전(官職名辭典)』, 네이버지식백과, 2011.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찬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9.
  • 남도영, 「조선시대의 마정연구」, 『한국학연구』 1, 1976.
  • 조병로 외, 「조선시대 사복시 재정운영 연구(Ⅰ) - 『太僕定例』 및 『太僕定例橫看』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84,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