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檢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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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관(藝文館) 정9품 관원이며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

개설

조선시대 예문관 정9품 관원으로 춘추관 기사관을 겸직했다. 정원은 4명으로, 봉교(奉敎) 2명, 대교(待敎) 2명과 더불어 한림(翰林)이라고 불리는 대표적인 청직(淸職)이었다. 검열(檢閱)은 조정의 각종 회의와 모임에 참석하여 『조선왕조실록』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는 사초(史草)를 작성했다. 문과 출신자 중에서 사관들의 자천(自薦)을 통해 임명했고, 『춘추좌씨전』이나 『자치통감』을 시험 과목으로 하여 선발했다. 검열은 사초를 작성하는 임무 외에 왕의 명령을 수행하는 역할도 했기 때문에 승지와 함께 근시(近侍)라고 불렸다.

담당 직무

조선시대 전임 사관이었던 검열은 예문관 소속 정9품 관원이면서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는 다소 애매한 관직이었다. 이는 고려시대 이래로 교명(敎命)을 작성하는 한림원(翰林院)과 사관(史館)이 밀접히 관련되었던 경험에서 유래하며, 조선시대 『경국대전』에서도 관례적인 직제가 그대로 반영되었다.

검열은 왕의 교명을 검토하는 역할을 맡은 관리이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사관이 아닌 예문관이나 한림원 계열의 관원이 된다. 실제로 사관의 별칭인 한림은 고려시대나 중국에서는 조서를 짓는 관서에 배속된 관원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한림만이 사관이었다.

이들은 예문관에 숙직하면서 사초를 작성하고, 춘추관과 외사고(外史庫)의 역사 기록에 대한 관리를 맡았다. 사초에는 조정의 사실과 조정에서 나온 발언뿐 아니라, 사관 자신의 견문과 소견도 기록할 수 있었다. 전임 사관의 역할은 경연 사목(事目)이 제정됨에 따라 입참(入參)을 항식(恒式)으로 삼고 조계(朝啓) 참여, 행행(行幸)의 시종 등으로 영역이 확대되었다. 또한 사관이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근시로 인정되었다. 경연 등에 참여하는 것은 이미 고려말부터 문제가 제기되어 꾸준히 확대되어 왔지만, 정청(政廳)과 국청(鞫廳) 참여를 둘러싼 논의로까지 전개되었다. 검열은 근시였기 때문에 종묘 등의 관리 상황을 살피고, 대신의 의견을 종합하여 왕에게 보고하거나 왕의 명령을 받아 관리의 질병 등을 위로하기도 했다.

특히 검열은 성균관이나 사학(四學)을 감찰하는 직무를 수행했는데, 이는 사관이 후임을 추천하여 직접 선발하는 자천제(自薦制)의 바탕이 되었다. 검열에 자천제로 선발된 사관은 봉교·대교의 동의를 거쳐 사실상 임명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허참례(許參禮) 등 새로 임명된 사람에 대한 신고식이 사회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변천

고려시대부터 사관과 한림원은 함께 추천하여 직사관을 뽑고, 사관이 직한림원을 뽑기도 하는 등, 두 관서는 서로 관리 임용에서 피차의 구분 없는 모습을 보였다. 직사관은 한림원과 사관이 예문춘추관으로 통합되면서 품관화되어 정7품·정8품·정9품의 참하관(參下官)이 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는 태조 원년에 고려시대의 관직대로 공봉·수찬·직관이라고 하였다. 1401년(태종 1)의 신사관제(辛巳官制)에 이르러 예문관과 춘추관을 분리하면서 직관의 명칭을 검열로 바꾸어 예문관에 소속시켰다. 이때부터 봉교·대교·검열이라는 관직 명칭을 얻게 되었고 이것이 『경국대전』에 그대로 기록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9.
  • 택와 허선도 선생 정년 기념 한국사학논총 간행위원회 편, 『택와 허선도 선생 정년 기념 한국사학논총』, 일조각, 1992.
  • 정구복, 「고려시대의 사관과 실록 편찬」, 『제3회 국제학술회의 논문집』, 1984.
  • 한우근, 「조선전기 사관과 실록 편찬에 관한 연구」, 『진단학보』 66,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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