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시(檢屍)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검시 |
한글표제 | 검시 |
한자표제 | 檢屍 |
관련어 | 초검(初檢), 복검(覆檢), 무원록(無寃錄),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
분야 | 정치/사법/법제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강석화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검시(檢屍) |
살인이나 자살 등 변사 사건이 일어날 경우 사망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시신의 상태를 조사하는 일.
개설
인명 치사 사건이 일어날 경우 한성부 오부의 관료나 지방의 수령은 일정한 절차와 규정에 따라 시신의 상태를 철저히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사인 규명과 범인 수사의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검시(檢屍)의 대상은 자살과 피살 등 변사로 인한 사체였으며, 기결수나 미결수 등 죄수가 죽었을 경우에도 검시하였다. 관청 소속의 공천(公賤)인 경우 변사자가 아니어도 검시 절차를 거치도록 하였다. 국문을 받던 중 사망한 경우는 모두 검시의 대상이었으나, 유배지에서 죽은 종친(宗親)·훈신(勳臣)·문관(文官)·음관(蔭官)·무관(武官) 하대부(下大夫) 이상자 및 시종신(侍從臣) 경력자는 검시의 대상이 아니었다. 관료의 처와 사족의 부녀 시신도 검시하지 않았다. 정배된 죄인이 죽으면 지방관이 직접 검시하여 감영에 보고하고 감영에서는 다시 왕에게 아뢰도록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일반적인 치사 사건의 경우 철저한 조사를 위해 2회 이상의 검시 절차를 밟았다. 처음 시신을 검시하는 초검(初檢)은 시체가 발견된 곳의 지방관이 담당하였으며 시신의 상태와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기록하여 한성부나 감영에 제출하였다. 초검이 끝난 후에 서울은 한성부의 관원이, 지방에서는 인근 읍의 수령이 2차 검시를 시행하였다. 이를 복검(覆檢)이라 하며, 초검관은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누설할 수 없도록 하여 복검관이 검시 때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하였다. 복검관은 초검관과 마찬가지로 시신의 상태와 주변 인물의 증언을 기록하여 독자적인 검시서를 상부에 제출하였다.
형조의 상복사(詳覆司)나 지방 관찰사는 초검관과 복검관의 검시 내용을 검토하여 일치할 경우에는 추가 조사 없이 사건을 종결하였으나, 사망 원인 등에 대한 내용이 일치하지 않거나 검시에 문제가 있을 경우 3검이나 4검을 거쳤다. 서울은 형조의 낭관이, 지방은 관찰사가 지정한 임시 관원이 다시 검시하였다. 이미 매장된 경우는 원칙적으로 초검관과 복검관의 검시 보고서 내용을 대조하여 미비한 점을 규명하였으나, 원인 불명의 살인이나 암매장을 한 경우는 중앙에 보고한 후에 시신을 파내어 검시하였다.
검시관은 구리로 만든 검시척(檢屍尺)을 이용하여 시신의 상처 크기나 여러 가지 흔적을 상세히 조사하였고, 은비녀를 이용하여 독살되었는지를 판단하였다. 검시 내용은 『무원록(無寃錄)』의 검시장식(檢屍狀式)에 의거하여 기재하였다. 『무원록』은 원나라왕여(王與)가 송대에 간행된 『세원록(洗寃錄)』과 『평원록(平寃錄)』 및 『결안정식(結案程式)』 등을 참작하여 편찬한 검시 전문 서적이다. 1438년(세종 20)에는 주석을 붙인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이 간행되었다. 무원록은 검시의 지침서였으며 검시장식은 검시 내용을 기록하는 표준 서식이었다. 한성부의 오부와 전국 각 읍에 인쇄된 검시장식을 반포하여 조사 내용 기술의 표준화를 이루려 하였다.
초검관은 출발 전에 출발 일시와 함께 검험하는 서리와 직접 시신을 만지는 인원들의 성명, 시체가 놓여 있는 장소와 거리를 빠짐없이 기록하였다. 시신이 발견된 장소에 도착한 초검관은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소집하고 이들의 신상을 기록하였으며 주변 인물들을 통해 시신의 신원을 먼저 탐문하였다. 이어서 시신의 방향이 어느 쪽인지,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여 기록하고, 실내에서 발견된 시신은 사방 벽과 문에서의 거리를 정확히 기재하였다.
이같이 시신의 주변 상황을 적은 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신에 남은 특이한 흔적을 조사하였다. 안색, 시반의 변화 양상, 상흔의 위조 여부가 주요 조사의 대상이었다. 목을 매어 숨진 경우 시신의 신체 길이와 목을 맨 곳의 위치, 사용된 끈의 종류와 흔적 등을 자세히 기록하며, 허공에 떠 있는지, 밟고 올라선 물건이 있는지 등도 확인하였다. 물속에서 발견된 시신은 물의 깊이와 수면의 너비를 측정하고, 화재가 일어난 장소에서 발견된 시신인 경우 주변 정황도 빠짐없이 기재하였다. 구타 혹은 흉기로 인한 사망자는 그 흔적과 내용을 적었다. 조사가 끝나면 검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명을 받아둔다. 끝으로 사망 원인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재검관도 동일하게 기재하였다. 그러나 재검 시에는 이미 시신이 초검시보다 더욱 손상되거나 부패가 진행된 상태이므로 검시가 곤란하여 재검관은 직접 검시하지 않고 수하 인원들에게 위임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초검과 복검의 내용이 어긋날 경우 3검이나 4검이 진행되었으므로 주변 인물들을 통해 초검의 내용을 미리 파악하여 초검 결과에 맞추려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검시관으로 임명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직접 검시하지 않고 아전이나 서리에게 위임한 관원은 처벌을 받았다. 이러한 절차에 입각한 검시 방식은 조선후기까지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김호, 「『新註無寃錄』과 조선전기의 檢屍」, 『법사학연구』27,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