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추사(巨酋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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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호족과 수호대명(守護大名)이 조선에 보낸 사절.

개설

조선초기 조정은 일본의 실정막부(室町幕府)와 국교를 재개하고 사절단을 교환하였다. 명으로부터 각각 조선 왕과 일본 왕으로 책봉을 받은 조선의 왕과 일본의 막부 장군은 대등한 위치에서 공식적인 관계를 수행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 일본의 대외 관계는 실정막부 장군이 독점한 것이 아니라 유력 수호대명을 비롯한 여러 통교자가 독자적인 통교를 하였다. 조선과의 통교자 가운데 막부 장군 이외에 대표적인 예가 거추사(巨酋使)였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의 통교 체제를 정비하기 위하여 세견선(歲遣船)의 정약(定約)과 함께 승선 인원수, 체류 기간, 접대 방식에 대해서도 세밀하게 규정하였다. 그 이유는 입국 왜인의 횡포와 질서 문란을 규제하고, 접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은 접대 규정이 최종적으로 정비된 때는 성종 초기 예조 판서였던 신숙주(申叔舟)에 의해서였다.

1471년(성종 2) 신숙주는 왕명을 받아 편찬한 『해동제국기』「조빙응접기(朝聘應接記)」 제사정례(諸使定例)에서 일본에서 오는 사송인을 ①일본국왕사 ②거추사 ③구주절도사 및 대마도주특송사 ④제추사 등 4등급으로 나누었다.

일본국왕사는 실정막부의 장군이 보낸 사절이고, 거추사는 대내(大內)·소이(小貳) 등 서부 지역의 대호족과 전산(畠山)·세천(細川)·사파(斯波) 등 막부의 세 관령(管領), 경극(京極)·산명(山名) 등 유력 수호대명의 사절이 여기에 해당하였다. 제추사는 일본 본토와 대마도 등의 소호족과 수직인(受職人)·수도서인(受圖書人)의 사절이 이에 포함되었다.

내용 및 특징

1. 거추사의 접대 규정

성종 초기 이루어진 통교 체제의 개혁과 접대 규정의 정비책에 의하여 각 사절은 이 등급에 따라 분류되었고, 사송선(使送船)의 수와 통교 횟수, 문인(文引)의 지참 여부, 사송선의 대소·선부(船夫)의 정액(定額), 급료, 영접할 때와 보낼 때의 접대관의 격, 삼포(三浦)에서의 음식 대접[熟供], 상경인(上京人) 수, 삼포연(三浦宴)·노연(路宴)·경중영전연(京中迎餞宴)·주봉배(晝奉盃)·궐내연(闕內宴)·예조연(禮曹宴)·명일연(名日宴)·하정(下程)·별하정(別下程) 등 각종 연회, 예사(例賜)·별사(別賜)와 같은 하사품, 포소 정박 기간[留浦日限]·선박 수리[修船給粧], 상경 도로, 일공(日供) 등 각종의 차등적 응접 규정이 세밀하게 정비되었다.

거추사는 일본국왕사 다음으로 우대를 받았다. 사송선의 경우 일본국왕사와 마찬가지로 통교 횟수에 구애를 받지 않았고, 도항하면 무조건 접대를 받았다. 거추사의 경우 삼포에 도착한 후 하선연(下船宴) 등의 환영 접대를 받았다. 상경해도 좋다는 허락이 있으면 거추사 일행은 15명 이내의 인원으로 정해진 상경로를 거쳐 서울로 올라왔다. 삼포에서 상경하는 데는 13~21일 정도 소요되었는데, 도중에 해당 지역의 관찰사가 베푸는 연회에 참여하였다. 서울에 도착하면 한강에서 영접을 받고,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2. 거추사의 종류와 통교

『해동제국기』에는 7씨족이 거추사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는 다시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의 통교 사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유형은 대내 씨와 소이 씨였다. 이들은 서부와 구주 지역의 대호족으로 실정막부가 조선과 통교하기 전 고려말기부터 통교를 해 왔다. 조선조에 와서도 왜구 진압이 막부 장군 단독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 조정은 서부 지역의 실력자들에게 왜구 금압을 요청하였다. 통교권의 다원화 현상이 고려 말기부터 있었는데, 이것이 조선 왕조까지 이어진 것이다.

대내 씨는 고려말기인 1378년(우왕 4) 조정으로부터 왜구 금압을 요청받았다. 이때부터 조선초기까지 왜구 금압과 피로인 송환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조정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소이 씨는 일본의 서부 지역을 통치하는 태재부(太宰府)의 최고 관리로서 대마도를 관장하였다. 소이 씨 또한 고려말부터 왜구 진압과 피로인 송환에 적극 응하면서 조정으로부터 구주 지역의 웅족(雄族)으로 인정받았다.

제2유형은 사파·세천·전산 씨였다. 이들은 모두 실정막부의 3가지 관령으로서 막부 정치 담당자의 자격으로 통교자를 파송하였다. 사파 씨의 최초 통교는 1409년(태종 9) 관령 명의로 조선의 의정부정승에게 서계를 보낸 것이었다. 서계 내용은 공식적 임무이고 그 밖에 사적인 일로 대장경을 구청(求請)하였다. 1414년(태종 14) 처음으로 독자적인 사절을 파견하였고, 1420년(세종 2) 회례사 송희경(宋希璟)과 1429년(세종 11) 통신사박서생(朴瑞生)이 접대역을 담당하였다. 조선에서는 사파 씨를 대내 씨의 예에 준하여 접대하였고, 왕의 인견을 허락하였다.

세천 씨는 1439년(세종 21) 통신사고득종(高得宗)이 귀국하였을 때 관령으로서 예조 판서 앞으로 서계를 보내 왔고, 1457년(세조 3) 단독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전산 씨는 1443년 통신사변효문(卞孝文) 일행이 일본에 갔을 때 관령으로서 접대역을 담당하였고, 1455년(세조 1)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모두 관령의 직에 있을 때 막부의 외교 사무를 담당하면서 조선 조정에 존재를 알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해 독자적인 통교권을 확립하였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제3유형은 경극과 산명 씨였다. 경극 씨는 1458년(세조 4) 독자적으로 사절을 파견하였다. 산명 씨는 1459년(세조 5) 사절을 파견해 불상을 바치면서 명주와 호피 등을 구청하였다. 이들은 막부 정권 아래 4대 유력 수호대명에 속하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통교 실적이나 막부의 외교 담당 직무와 관계없이 처음부터 독자적인 통교자로 등장하였다. 통교 개시 시점도 세조 초기로 일본 측의 통교자가 급증하는 시점이었다.

변천

1467년부터 일본에서 응인(應仁)의 난이 일어나면서 막부의 통제력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이를 계기로 조선과의 통교 성격이 크게 변화하였다. 거추사의 사절 파견 횟수도 증가하였고 다수의 새로운 통교자가 등장하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거추사들이 왕명을 가탁(假託)해 사적인 통교를 도모하는 일이 많아졌고, 가짜 사절[僞使]도 생겼다. 사절 파견의 목적도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자신들의 전비(戰費)를 요청하는 등 이전과 성격이 크게 달라졌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따라 당연히 조선 조정도 거추사에 대한 대우를 재검토하기에 이르렀고, 접대에 관한 규정을 정비하였다.

한편 1485년(성종 16) 완성된 『경국대전』「예전(禮典)」 대사객(待使客)에는 일본국왕사와 거추사 사이에 일본국제대신사(日本國諸大臣使)가 새로 생겨났다. 사송인의 접대 규정을 4등급에서 5등급으로 세분화한 것이었다. 구체적인 접대 내용을 보면 일본국제대신사가 『해동제국기』의 거추사와 동일하고, 『경국대전』의 거추사는 『해동제국기』의 대마도주특송사와 구주절도사와 일치하였다. 일본국제대신사는 기존의 거추사 7씨 가운데 소이 씨가 탈락하고, 대신 삽천(渋川, 우무위)·이세(伊勢)·갑비(甲斐) 3씨가 새로 포함되어 모두 9씨가 되었다.

응인의 난 이후 생겨난 새로운 현상과 정세 변화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으로 나타난 결과였다. 그런데 성종 중기 이후로는 기존의 거추사 중에서 대내와 소이 씨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모습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이들 세력이 응인의 난 이후 몰락하였기 때문이다. 16세기 중기 이후 거추사를 칭하는 사절이 오지만 대부분 가짜 사절이었다. 자연히 거추사에 대한 조선의 접대도 바뀌었고, 거추사는 자연스럽게 쇠퇴하였다.

조선후기에 이르면 거추사가 완전히 없어졌다. 1609년(광해군 1) 체결된 기유약조를 보면, 제1조에 “왜관의 접대는 세 가지 예가 있는데, 국왕사가 1례이고, 대마도주특송이 1례, 대마도수직인이 1례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조선과 통교할 수 있는 대상은 막부 장군과 대마도주, 수도서인뿐이었다. 즉, 막부 장군을 제외한 통교 가능자를 대마도인으로 국한하였다. 따라서 막부와 대마도를 비롯한 호족들의 통교를 허락하였던 조선전기와 달리 덕천막부(德川幕府)의 통교 체제 일원화 방침에 따라 거추사와 제추사가 폐지되었음을 뜻하였다.

의의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사회에서는 중앙정부 간의 일원적인 통교가 일반적 관례였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막부 장군 외에도 다수의 통교자가 존재하였다. 이것은 실정막부 시대의 독특한 정치 체제와 외교 정책에 기인한 것으로 일본 역사에서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사회에서도 유례가 없는 독특한 방식이었다. 이른바 ‘다원적인 통교 체제’였다.

다원적 통교자 중에서 대표적인 사례가 막부의 관령과 서부 지역의 대호족으로 이루어진 거추사였다. 그런데 거추사는 15세기 후반 응인의 난 이후 일본의 정치 정세가 급변하면서 몰락하였고 대신 가짜 사절이 성행하였다. 이에 따라 거추사도 자연스럽게 쇠퇴하였으며, 조선후기에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고려사(高麗史)』
  •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 이현종, 『조선 전기 대일교섭사 연구』, 국학연구원, 1964
  • 하우봉, 『강좌 한일관계사』, 현음사, 1994
  • 長正統, 「中世日鮮關係における巨酋使の成立」, 『朝鮮學報』41,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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