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姜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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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3년(명종18)~1640년(인조18) = 78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자미(子美), 호는 일진(一塵)인데, 스스로 호(號)를 사괴자(四乖子)라고 하였다. 본관은 진주(晉州)인데, 시조는 강민첨(姜民瞻)이고, 호조판서강섬(姜暹)의 손자이다.

임진왜란 때 종묘 신주 모시기

1590년(선조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음보(蔭補)로 평양(平壤)의 영숭전(永崇殿)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선조가 평양에 몽진(蒙塵)하자, 종묘사직(宗廟社稷)의 신주(神主)를 평양의 영숭전에 옮겨 모시고, 강선을 종묘(宗廟)봉사(奉事)로 임명하였다. 선조가 순안(順安)으로 향하게 되자, 강선은 종묘사직의 여러 신주와 고사(故事) 3권 및 홀기(笏記) 3첩(帖)을 모시고 따라가려고 하였는데, 찰방(察訪)이 이것들을 실을 말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이때 강선이 그 옷깃을 틀어잡고, “당신이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고, 그 옷깃을 놓아 주지 않고 버티니, 찰방이 어쩔 수 없이 말 두 필을 내어주었다. 종묘사직의 신주를 모시고 안주(安州)에 이르자, 선조의 특명으로 직장(直長)에 승진하였다. 처음에 강선이 종묘 각실(各室)의 금보(金寶)와 옥보(玉寶)를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게 건네주어 깊은 산에 묻게 하였는데, 영숭전의 수용(睟容)도 종묘의 신주와 같이 받들어 묻으려고 하였으나, 관찰사가 허락하지 않았다. 전후에 금보와 옥보는 보전되었으나, 수용은 병화(兵火)에 유실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이후의 활동

왜란 직후에 선공감(繕工監)직장에 임명되었고, 1605년(선조38) 호성 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에 책훈(策勳)되었다. 1608년(광해군즉위년) 종묘가 새로이 조성되자, 의물감조관(儀物監造官)에 차출되었고, 얼마 뒤에 제용감(濟用監)직장, 장례원(掌隸院)사평(司評)으로 승진하였다. 광해군 때 종묘사직의 신주를 보호한 공이 있다고 하여 위성공훈(衛聖功勳) 3등에 책훈되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전결(田結)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에 광해군 때에 받은 공신(功臣) 작호와 전결, 노비를 박탈당하였다가, 상신(相臣) 이원익(李元翼)과 윤방(尹昉)의 노력으로 다시 되돌려 받았다. 1640년(인조18)에 죽으니, 향년 78세였다.

저서로는 『백치둔필(白癡鈍筆)』이 남아 있는데, 백치는 그의 재호(齋號)였다.

성품과 일화

강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이 남아 있다. 그는 얼굴이 넓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체구가 컸다.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으며, 충성스럽고 근면하였다. 조용히 스스로 자기를 지키며, 남과 교유(交遊)를 일삼지 않고,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좌우의 서사(書史)를 놓고 읽었다. 또 남에게 청탁(請託)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벼슬은 미관(微官)에 그치고 크게 현달(顯達)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스스로 호를 ‘사괴자(四乖子)’ 라 하였는데,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려던 생각이 어긋났고,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려던 계책이 어긋났고, 자기를 도모하려던 지혜가 어긋났고, 남에게 좋게 대하려던 태도가 어긋났다고 스스로 뉘우친다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묘소와 비명

묘소는 충청도 청풍(淸風) 상악산(上岳山)에 있는데, 임상원(任相元)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朝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백호전서(白湖全書)』
  • 『성호사설(星湖僿說)』
  • 『고담일고(孤潭逸稿)』
  • 『고산유고(孤山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