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정식(甲午定式)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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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갑오정식 |
한글표제 | 갑오정식 |
한자표제 | 甲午定式 |
관련어 | 계사수교(癸巳受敎) |
분야 | 정치/행정/정책 |
유형 | 법제·정책 |
집필자 | 조준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갑오정식(甲午定式)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22년 8월 4일, 『효종실록』 8년 6월 21일, 『숙종실록』 29년 4월 4일, 『숙종실록』 30년 6월 25일, 『숙종실록』 39년 9월 25일, 『숙종실록』 40년 7월 11일, 『영조실록』 17년 4월 8일 |
1714년(숙종 40)에 단행한 서원 훼철 조치.
개설
갑오정식(甲午定式)은 1714년에 숙종이 단행한 서원 훼철 조치이다. 1703년을 기준으로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건립한 원사(院祠)를 일체 훼철하게 한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 서원 폐단에 대한 국가의 첫 번째 해결 시도이다. 이후 영조는 1741년 전국적인 서원 훼철을 단행할 때 ‘갑오정식’이 시행된 시기를 기준 연도로 삼았다.
내용
1) 서원 폐단에 대한 대책 논의
서원은 17세기에 발전하며 전국적으로 건립되었는데, 이 시기 서원은 점차 중앙 집권당의 정치적 이해를 반영하였다. 이 과정에서 도학자 중심이었던 제향 인물의 선정 기준이 무너져 특정 정파를 대표하는 인물과 정치적 피해를 본 사람을 서원에 향사하게 함으로써 남설의 현상을 유발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에서는 서원의 병폐에 대한 대책론이 일어났다. 최초의 주장은 1644년(인조 22) 경상감사임담(林墰)이 올린 상소를 계기로 해서였다. 임담은 서원의 폐단을 거론하며 그 건립 사실을 국가가 파악해야 옳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인조실록』 22년 8월 4일). 이후 1657년(효종 8) 충청감사서필원(徐必遠)은 도내 서원의 실상을 상소하면서 그 폐단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효종실록』 8년 6월 21일). 하지만, 서필원의 주장은 송시열 등 산림 세력의 반발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도리어 산림 세력은 서원에 대한 보호와 장려책을 주장하였고, 중앙 정부 차원에서 이를 시행하게 함으로서 이후 서원이 문란해지는 배경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흐름 위에 숙종 연간 거듭된 환국을 통해 서인과 남인 세력들이 경쟁적으로 자파계 서원의 건립과 사액을 지원함으로써 폐단이 심화되어 갔다.
2) 계사수교(癸巳受敎)와 갑오정식의 제정
서원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시기는 1703년(숙종 29)이었다. 주목되는 점은 이전까지 서원에 대한 장려책을 주도해왔던 노론계 일각에서 서원 첩설(疊設)의 폐단을 거론하기 시작했던 점이다. 즉, 척족(戚族)으로 명망이 있던 민진원(閔鎭遠)은 서원의 폐단을 들어 한 고을에서 사사로이 서원을 건립했을 때, 해당 지방관을 논죄하고 주도한 유생의 정거(停擧)를 요청하였다(『숙종실록』 29년 4월 4일). 뒤이어 그의 형인 민진후(閔鎭厚)가 예조 판서가 됨에 따라 첩설의 폐단을 극론하고 사액을 요청하는 상소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숙종실록』 30년 6월 25일). 이어 1707년(숙종 33)에 금령을 어기고 사사로이 건립한[冒禁私建]한 서원에 대한 훼철을 다시 결정하고, 말썽이 많은 피역(避役) 문제와 관련하여, 원생에 대한 정례적인 고강(考講)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때 논의되기 시작한 통제책은 7~8년이 지나 비로소 집행되기 시작한다.
1713년(숙종 39) 국왕은 서원 첩설의 폐단을 지적하며 금지를 하명하였고, 예조 판서민진후에게 서원 문제를 전담하게 하였다. 이를 ‘계사수교’라 한다. 민진후는 이전부터 논의되었던 사사로이 건립한 서원에 대한 죄를 물어 감사와 수령을 논죄하고 수창유생(首倡儒生)을 3년간 정거하도록 하였고, 앞서 1703년(숙종 29)을 기준 연도로 하여 이해 이후로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창건한 곳을 각 도의 감사가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건의하자, 왕이 이를 따름으로서 서원 정리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숙종실록』 39년 9월 25일).
그리하여 이듬해 1714년(숙종 40)에 평안도의 사장(査狀)이 올라왔을 때, 하나하나 심의하여 기자서원(箕子書院) 3개소만 남기고 일체 훼철하게 하였다. 이를 ‘갑오정식’이라 한다(『숙종실록』 40년 7월 11일). 이후 병신 처분으로 조정이 혼란하여 조사가 한때 중단되었다가, 1717년(숙종 43) 여러 도의 서원에 대한 명단이 보고되자 다시 심의하여 훼치(毁置)를 결정하였다.
당시의 서원 훼치에 대한 심사는 공개적이 아니라 국왕과 노론계 민진후 사이에서만 이루어져 공정하였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수십 개소에 이르는 송시열 제향 서원이 여전히 훼철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었던 점은 당시의 처분이 당파적 색채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었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숙종 후반기 계사수교에 이은 갑오정식의 단행은 서원의 폐단을 조정하려는 첫 번째 시도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바로 영조대에 단행된 대대적인 서원 훼철 조치의 기준 연도가 되었다.
3) 갑오정식과 영조대의 서원 훼철
영조 연간 탕평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던 시기, 왕은 당쟁 유발의 요인이 되던 이조 전랑의 통청권을 혁파하고 이어 서원에 대한 정비 작업을 단행하였다. 1741년(영조 17) 함경도 북청에서 이항복(李恒福)을 제향하던 서원에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를 추배한 사건이 발생하여 정국이 가열되었다. 영조는 이를 계기로 탕평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숙종 연간 갑오정식 이후 그때까지 사사로이 건립한 모든 서원과 사우에 대해 일체 훼철을 명하였다(『영조실록』 17년 4월 8일). 이때 170여 개의 원사가 훼철되었고, 사사로이 건립된 서원에 대해 지방관의 유배까지 규정한 벌칙을 강화하여 향후 폐단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결국 이러한 조치로 서원의 첩설과 남설이라는 조선후기 사회의 큰 폐단은 일단 가라앉았다.
하지만 당쟁의 제거를 목적으로 숙종~영조 연간에 추진된 서원 훼철은 정치적 목적에서 진행된 측면이 강했다. 이후 서원은 국가의 금령 속에 후손들의 관여가 현저해져 무분별한 서원 제향은 물론이고 향촌민에게 끼치는 사회적 폐단은 전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9세기 세도정치 하에서 조장되다가 흥선대원군에 의해 대대적인 서원 철폐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정만조, 『조선시대 서원 연구』, 집문당,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