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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쇄국정책을 주장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 + | 조선은 쇄국정책을 주장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대두하자, 국내외정책의 변화를 꾀하였다. 통상 개화론자들이 개혁 추진과 함께, 문호 개방을 모색해나간 것이다. 다만, 그 계기가 일제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정한론이 비등한 가운데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제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개방을 강요해 왔던 것이다. 이에 어쩔 수 없이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자, 미국이 조선과의 수교에 다시 관심을 갖고 접근해왔다. 당시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유포되고 북양대신 이홍장이 일본의 견제와 러시아의 남하 방지를 권한 가운데, 고종도 새로운 기계문명을 배우고 지원을 받을 나라로 미국을 선택하였다. 또 중국의 속방에서 벗어나는 한편으로,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대외통상권을 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알선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였으며, 연달아 영국과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태리 등과도 외교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청국과의 관계는 고종 19년에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고 나서, 사대를 청산한 것은 1894년의 보호청상규칙에서였다. 기존의 화약을 폐기하기로 선언하여 종속적인 외교관계를 단절하게 된 것이다. |
− | + | 이렇게 조선은 각국과의 조약체결로 서양의 근대적인 사상과 문물 제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근대화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반면에, 서양 각국은 정동에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개설하고 각종 이권을 챙기려는 욕구에 혈안이 되어, 조선은 열강의 침략 경쟁의 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은 조선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들에게 유리한 조약체결을 강제하였다. 임오군란으로 인한 제물포조약과 갑신정변 후의 한성조약 등이 그것이다. 러일전쟁 후에는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 제2차 한일협약, 일한협약, 한국병합조약으로 국권을 하나씩 빼앗아가더니, 결국 대한제국은 식민지의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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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1일 (수) 17:15 기준 최신판
목차
근대조약
Story
근대조약(近代條約). 조선은 19세기 후반부터 외국과 근대 조약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 서양 여러 나라에도 차례로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적인 국가수립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20세기 초에 이르러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조선은 쇄국정책을 주장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 세력이 대두하자, 국내외정책의 변화를 꾀하였다. 통상 개화론자들이 개혁 추진과 함께, 문호 개방을 모색해나간 것이다. 다만, 그 계기가 일제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정한론이 비등한 가운데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던 일제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개방을 강요해 왔던 것이다. 이에 어쩔 수 없이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자, 미국이 조선과의 수교에 다시 관심을 갖고 접근해왔다. 당시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유포되고 북양대신 이홍장이 일본의 견제와 러시아의 남하 방지를 권한 가운데, 고종도 새로운 기계문명을 배우고 지원을 받을 나라로 미국을 선택하였다. 또 중국의 속방에서 벗어나는 한편으로,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대외통상권을 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알선으로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였으며, 연달아 영국과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태리 등과도 외교관계를 맺기에 이르렀다. 청국과의 관계는 고종 19년에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고 나서, 사대를 청산한 것은 1894년의 보호청상규칙에서였다. 기존의 화약을 폐기하기로 선언하여 종속적인 외교관계를 단절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조선은 각국과의 조약체결로 서양의 근대적인 사상과 문물 제도를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근대화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반면에, 서양 각국은 정동에 공사관이나 영사관을 개설하고 각종 이권을 챙기려는 욕구에 혈안이 되어, 조선은 열강의 침략 경쟁의 무대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은 조선 침략을 노골화하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저들에게 유리한 조약체결을 강제하였다. 임오군란으로 인한 제물포조약과 갑신정변 후의 한성조약 등이 그것이다. 러일전쟁 후에는 한일의정서와 제1차 한일협약, 제2차 한일협약, 일한협약, 한국병합조약으로 국권을 하나씩 빼앗아가더니, 결국 대한제국은 식민지의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Semantic Data
Node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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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0-401 | Event | 사건 | 근대조약(近代條約) | 근대조약 | 近代條約 | http://dh.aks.ac.kr/hanyang2/wiki/index.php/E0-401 |
Contextual Relations
Web Resour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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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위키백과 | 불평등 조약 | https://ko.wikipedia.org/wiki/불평등_조약 |
Bibliography
type | bibliographic index | online resource | ur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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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한승훈, 「「조미수호통상조약(1882)」 체결 당시 미국의 ‘공평함’이 갖는 함의 - 조선의 관세자주권 확보 시도와 좌절을 중심으로-」, 『전북사학』 52, 전북사학회, 2018.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333510 |
논문 | 유바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국제법적 지위에 관한 연구」, 고려대 박사학위논문, 2017. | ||
논문 | 권한용, 「일제식민지통치기 초기 조선에 있어서의 불평등조약의 국제법적 효력」, 『法史學硏究』 29, 한국법사학회, 2004. | KCI |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029199 |
단행본 | 동북아역사재단 편, 『근대 조약과 동아시아 영토침탈 관련 자료 선집 Ⅰ, Ⅱ』, 동북아역사재단, 2021. | ||
단행본 | 森万佑子, 『朝鮮外交の近代-宗属関係から大韓帝国へ-』, 名古屋大学出版会, 2017. | ||
단행본 | 동북아역사재단, 『한일 조약 자료집(1876~1910)-근대외교로 포장된 침략』, 동북아역사재단, 2020. | ||
단행본 | 동북아역사재단 한국외교사편찬위원회,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 근대 편』, 동북아역사재단, 2018. | ||
단행본 | 전명혁 외, 『근대동아시아 외교문서 해제 1~27』, 선인, 2017. | ||
단행본 | 최덕수 외, 『조약으로 본 한국근대사』, 열린책들, 2010. |
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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