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lial Son and Renaissance Leader, King Jeongjo of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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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

Jeongjo (1752-1800, r. 1776-1800) was the 22nd king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 He is remembered for the cultural golden age which began during his reign an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Born as Yi San to Crown Prince Sado (1735-1762) and Lady Hyegyeong (1735-1816), Jeongjo witnessed the execution of his father at the age of 10, after his father had shown signs of violent madness for some years. Despite his father’s unfavorable demise, his grandfather, King Yeongjo, had no other sons, making Jeongjo next in line to the throne.

Jeongjo began his reign in 1776 upon Yeongjo’s passing. To store and honor his grandfather’s writings, portrait, and personal artifacts, he had a pavilion, named Gyujanggak, built in the rear garden of Changdeokgung Palace. This pavilion can still be visited today. Gyujanggak served as a royal archive cum library and was the first of its kind in Joseon. Its collections quickly grew, and an Outer (Oe) Gyujanggak was constructed on Ganghwado Island in 1782 to facilitate additional storage. Today, the collection – which contains a number of UNESCO Memory of the World heritages including the Veritable Records of the Joseon Dynasty, the Royal Protocols of the Joseon Dynasty, and more – is stored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Gyujanggak was staffed with the best and brightest, regardless of their social class. The staff not only oversaw the archives, but also took on the responsibilities that had traditionally belonged to other government offices, such as serving as secretary for the king’s meetings and overseeing educational policies. The value Jeongjo placed on art and culture was reflected in Joseon society, which saw cultural golden age during his reign. Paintings and writings began to feature native Korean, rather than Chinese, scenes - as seen in the "true-view landscapes" (jingyeong sansuhwa) and genre paintings of Kim Hong-do and Sin Yun-bok, while not only the upper class, but also commoner class, experienced widespread cultural development.

Jeongjo is also remembered for his filial devotion to his parents. Immediately upon ascending the throne, Jeongjo reaffirmed to the high officials that he was the son of Crown Prince Sado – a name which was feared as many of those high officials had encouraged Sado’s execution. He also posthumously made his father a king, which allowed his mother to have the status of Queen Dowager. In 1789, Jeongjo had his father’s tomb relocated to Hwasan Mountain (in present-day Suwon) and rebuilt to the scale of that of a late king. He visited the tomb yearly to hold ancestral rituals, and in 1792, he ordered the design of a large fortress with a temporary palace (haenggung) to be built nearby. The fortress, named Hwaseong, was completed in 1796. In 1795, the royal procession to the tomb was held in particularly grand fashion, as it was the 60-year anniversary of the birth of both his late father and living mother. The procession, which included some 5,000 people and 800 horses, and the following banquet was recorded in the royal protocols (uigwe) and depicted on an eight-panel folding screen. Today, this procession is reenacted each year at Hwaseong Fortress, which was named a UNESCO World Heritage in 1997.

Jeongjo died at the age of 48 from complications from a sudden abscess. He was survived by his mother. His son, Sunjo, became the next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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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gneung and Geolleung Royal Tombs, Hwaseong



  •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

조선 시대의 화려한 왕릉 중 하나인 화성의 융릉과 건릉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유산에 깊은 인상을 남긴 곳입니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조선 왕조의 복잡한 가족 관계와 건축적 유산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융릉은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와 그의 아내 혜경궁 홍씨의 묘소입니다. 사도세자는 조선 영조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아들 정조는 후에 수원화성을 건설했습니다. 이처럼 융릉은 단순한 묘소가 아니라 조선 왕실의 역사가 응축된 장소입니다.

건릉은 조선 정조의 묘소로, 그의 업적과 생애를 기리는 장소입니다. 정조는 아버지 장조를 기리며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건축하였으며, 그가 남긴 문화적 유산은 한국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에 의해 건설된 요새로, 그 당시의 첨단 기술이 적용된 건축물이었습니다. 이곳은 정조의 이상을 담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그의 업적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에는 상세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방문객들이 더욱 쉽게 그 역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현재 융릉과 건릉은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여러 웹 리소스를 통해 그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들은 3D 지도와 다양한 스토리를 통해 방문자들에게 더 생생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Temporary Palace and Shrine at Hwaseong Fortress



  •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

조선 시대의 위대한 왕, 정조는 수원 화성행궁을 창건하여 이곳을 조선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는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정조는 화령전 안에 모셔져 있으며, 화령전은 운한각과 풍화당 같은 중요한 건축물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수원 화성행궁에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중 낙남헌, 득중정, 봉수당, 신풍루 등은 메타버스에서 3D 모델로 구현되어, 디지털 시대에 그 아름다움을 새롭게 느낄 수 있습니다. 각각의 3D 모델은 문화 포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건축물의 역사와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줍니다.

화성행궁의 전체 모습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화성행궁도」와 『화성성역의궤』의 「행궁전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도면들은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 시대의 건축적 아름다움과 도시 계획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정조가 수원 화성행궁을 세운 이유는 단순한 왕궁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조선 왕조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비전과 노력을 담고 있는 장소이며, 오늘날에도 그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수원 화성행궁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문화유산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King Jeongjo’s Visit to Hwaseong Fortress in 1795



  • Korean Narrative (Generated by ChatGPT 4.0)

1795년의 어느 봄날, 조선의 정조 임금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화성으로 성대한 행차를 떠났습니다. 이 여정은 8일간의 대규모 행사가 포함된 특별한 이벤트였으며, 이를 통해 정조는 자신의 통치력을 과시하고 왕실의 위엄을 드높이려 했습니다.

행차는 수원화성행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을 명한 곳으로, 낙남헌, 득중정, 봉수당과 같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낙남헌에서 문무과별시가 열렸고, 이는 낙남헌방방도에 생생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어진 행사로는 수원향교에서의 알성례와 서장대에서의 군사훈련이 있었습니다. 특히 서장대야조는 밤에 군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그린 서장대야조도로 묘사되어 있어 당시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중요한 날인 2월 14일에는 득증정에서 불꽃놀이가 펼쳐졌고,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봉수당에서 열렸습니다. 이 모든 순간들은 봉수당진찬도와 같은 그림들로 세세히 기록되었습니다.

정조는 이 모든 행사들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백성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그는 한강주교환어를 통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이 장면은 한강주교환어도에 담겨 있어, 당시의 감동적인 모습을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단순한 여행이 아닌, 그의 정치적 비전과 가족 사랑이 어우러진 문화적 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꼼꼼히 기록되어 후대에 전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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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won Hwaseomun Gate (K-HERIT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