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집자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새 문서: {{개념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칭=집자비 |한자표기=集字碑 |영문명칭= |이칭= |유형= |관련개념= }} =='''정의'''== 전해 내려오는 글씨...)
 
14번째 줄: 14번째 줄:
  
 
=='''내용'''==
 
=='''내용'''==
집자비(集字碑)는 글씨를 직접 써서 석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써놓은 글씨를 여기저기서 발췌하여 만든 석비다. 그렇기 때문에 글씨를 쓴 서사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며 서체의 유형도 조금씩 서로 다를 수 있다. 집자의 효시는 당(唐) 회인(懷仁)이 [[왕희지|왕희지(王羲之)]]의 글자를 집자하여 672년에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만든 것이 처음이다. 이를 모방하여 한국에서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집자비를 만들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유명한 명필의 글씨를 자본(子本)으로 집자되었는데 시대별, 개인별로 그 취향이 다르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3&Num=28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
===개요===
 +
집자비(集字碑)는 글씨를 직접 써서 석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써놓은 글씨를 여기저기서 발췌하여 만든 석비다. 그렇기 때문에 글씨를 쓴 서사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며 서체의 유형도 조금씩 서로 다를 수 있다.  
 +
집자의 효시는 당(唐) 회인(懷仁)이 [[왕희지|왕희지(王羲之)]]의 글자를 집자하여 672년에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만든 것이 처음이다. 이를 모방하여 한국에서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집자비를 만들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유명한 명필의 글씨를 자본(子本)으로 집자되었는데 시대별, 개인별로 그 취향이 다르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3&Num=28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우리 나라의 집자비로는 성교서에서 집자한 [[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鍪藏寺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가 처음이다. [[신라 애장왕]] 즉위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는 [[신라 소성왕]]의 계화부인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5070 집자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한국의 집자비===
 +
====통일신라시대====
 +
한국의 집자비로는 성교서에서 집자한 [[경주 무장사지 아미타불 조상 사적비|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鍪藏寺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가 처음이다. [[신라 애장왕]] 즉위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는 [[신라 소성왕]]의 계화부인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5070 집자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고려시대====
 
고려시대 집자비로는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흥법사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와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직지사대장각기비|직지사대장당기비(直指寺大藏堂記碑)]],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 등이 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3&Num=28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고려시대 집자비로는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흥법사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와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직지사대장각기비|직지사대장당기비(直指寺大藏堂記碑)]],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 등이 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3&Num=28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28번째 줄: 33번째 줄: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는 [[일연|보각국사 일연 (普覺國師 一然)]]의 비이다. [[죽허|죽허(竹虛)]]가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였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3&Num=28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는 [[일연|보각국사 일연 (普覺國師 一然)]]의 비이다. [[죽허|죽허(竹虛)]]가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였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3&Num=28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집자비는 18~19세기에 유행하였으며 서체가 다양해 졌다. [[김생|김생(金生)]]·[[최치원|최치원(崔致遠)]]·[[한호|한호(韓濩)]] 등과 [[왕희지|왕희지(王羲之)]]·[[안진경|안진경(顔眞卿)]]·[[회소|회소(懷素)]]·[[소식|소식(蘇軾)]] 등의 글씨를 집자하였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3&Num=28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조선시대의 집자비는 18~19세기에 유행하였으며 서체가 다양해 졌다. [[김생|김생(金生)]]·[[최치원|최치원(崔致遠)]]·[[한호|한호(韓濩)]] 등과 [[왕희지|왕희지(王羲之)]]·[[안진경|안진경(顔眞卿)]]·[[회소|회소(懷素)]]·[[소식|소식(蘇軾)]] 등의 글씨를 집자하였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research&No=3&Num=28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2017년 10월 3일 (화) 22:14 판

집자비
(集字碑)
대표명칭 집자비
한자표기 集字碑



정의

전해 내려오는 글씨를 그대로 응용하여 새긴 비.

내용

개요

집자비(集字碑)는 글씨를 직접 써서 석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써놓은 글씨를 여기저기서 발췌하여 만든 석비다. 그렇기 때문에 글씨를 쓴 서사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며 서체의 유형도 조금씩 서로 다를 수 있다. 집자의 효시는 당(唐) 회인(懷仁)이 왕희지(王羲之)의 글자를 집자하여 672년에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만든 것이 처음이다. 이를 모방하여 한국에서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집자비를 만들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유명한 명필의 글씨를 자본(子本)으로 집자되었는데 시대별, 개인별로 그 취향이 다르다.[1]

한국의 집자비

통일신라시대

한국의 집자비로는 성교서에서 집자한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鍪藏寺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가 처음이다. 신라 애장왕 즉위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는 신라 소성왕의 계화부인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2]

고려시대

고려시대 집자비로는 흥법사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직지사대장당기비(直指寺大藏堂記碑), 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 등이 있다.[3]

흥법사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 진공대사 충담(眞空大師 忠湛)의 비이다. 당 태종행서를 집자한 유일한 석비이다.[4]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 낭공대사 행적(朗空大師 行寂)의 비이다. 신라 명필 김생(金生)행서를 승려 단목(端目)이 집자하였다.[5]

직지사대장당기비(直指寺大藏堂記碑)는 직지사(直指寺)에 대장경을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으로 현재 비석은 전해지지 않고 탁본의 판독문이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과 조선후기에 이우(李)가 편찬한『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수록되어있다. 왕희지탄연(坦然)의 글씨를 집자하여 쓴 것으로 추정된다.[6]

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보각국사 일연 (普覺國師 一然)의 비이다. 죽허(竹虛)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였다.[7]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집자비는 18~19세기에 유행하였으며 서체가 다양해 졌다. 김생(金生)·최치원(崔致遠)·한호(韓濩) 등과 왕희지(王羲之)·안진경(顔眞卿)·회소(懷素)·소식(蘇軾) 등의 글씨를 집자하였다.[8]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집자비 A의 유형은 B이다 A dcterms:type B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집자비 A의 유형은 B이다 A dcterms:type B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집자비 A의 유형은 B이다 A dcterms:type B

시각자료

주석

  1.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2. "집자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4.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5.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6.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7.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8.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참고문헌

  •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집자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