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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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行寂)
BHST Monk1.png
대표명칭 행적
영문명칭 Haengjeok
한자 行寂
생몰년 832년(흥덕왕 7)-916년(신덕왕 5)
시호 낭공(朗空)
성씨 최씨(崔氏)
본관 하동(河東)
승탑비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낭공대사 행적(朗空大師 行寂)은 832년(흥덕왕 7) 하남(河南: 현재의 경상남도 하동)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최씨(河東 崔氏)이고, 그의 선대는 중국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인 태공망(太公望)의 먼 자손이다.

Quote-left.png 대사의 법명(法名)은 행적(行寂)이고 속성은 최씨이다. 그의 선대는 주나라 조정 상보(尙父: 太公望)의 먼 자손이자 제나라 정공(丁公: 태공망의 아들)의 먼 후예인데, 그 후손이 현토군(玄兎郡)에 사신으로 나왔다가 계림(鷄林: 신라)에 머물러 살아 지금은 경만(京萬) 하남(河南) 사람이 되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전(全)으로 세상을 피해 영화를 마다하고 깊이 들어앉아 정신을 수양하였다. 아버지의 휘는 패상(佩常)이며 9살 때 이미 관(冠)을 쓰고 약 삼동(三冬: 3년) 동안 공부하다가 자라서는 영원히 학문할 마음을 던져 버리고 무예(武藝)를 배울 마음이 일어나서 전쟁을 그치게 할 재주를 배웠으므로, 군에 들어가 관직을 역임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27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탄생설화

어머니 설씨(薛氏)는 꿈에 스님을 보고 대사를 잉태하였다.

Quote-left.png 어머니는 설씨(薛氏)로 꿈에 스님을 보았는데 (스님이) '전생부터의 인연을 좇아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하였다. 꿈을 깬 뒤에 신령스러운 상서로움을 느껴 그 사실을 남편에게 낱낱이 아뢰고, 스스로 기름진 음식을 끊고서 정성껏 태교(胎敎)를 행하여 태화(太和) 6년(832, 흥덕왕 7) 12월 30일에 대사를 낳았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27-2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유년기

행적은 어려서부터 모래로 탑을 만들고 놀았으며 출가에 뜻을 두었다.[1]

Quote-left.png 대사는 나면서부터 특이한 골상을 지녀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장난하며 놀던 어릴 때에도 반드시 불사(佛事)를 하여 언제나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항상 풀잎을 따서 향을 삼았다. 이에 어릴 때부터 스승을 찾아 나섰는데 학업을 청할 때에는 침식마저 모두 잊었고 글을 읽을 때는 뜻의 근원을 모두 파악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2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출가수행

행적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로 출가하여 화엄(華嚴)의 경론(經論)[2]을 연구하였다.

Quote-left.png 마침내 머리를 깎고 검은 승복을 입고는 배움에 노닐기를 갈구하였는데 배움의 바다를 찾고자 명산을 두루 찾아다녔다. 가야산 해인사(伽倻山 海印寺)에 이르러 곧 종사(宗師)를 배알하고 경론을 열심히 탐색하여, 화엄(華嚴)의 오묘한 뜻을 섭렵하고 경전(經典)의 참된 뜻을 망라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2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855년(문성왕 17) 복천사(福泉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강릉 굴산사(崛山寺)통효대사(通曉大師)를 찾아가 불법을 배웠다.

Quote-left.png 대중(大中) 9년(855, 신라 문성왕 17)에 복천사(福泉寺: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의 동쪽에 있는 절) 관단(官壇: 계를 받는 공적인 장소)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중략)... 드디어 굴산사(崛山寺: 지금 강원도 강릉에 절터가 남아 있다)로 가서 통효대사(通曉大師) 범일(梵日: 810-889)을 배알하고 스스로 온몸으로 예배하고 정성껏 깊은 생각을 아뢰니 대사는 곧 당(堂)에 오를 것을 허락하여 마침내 제자가 되었다. 이로부터 여러 해 동안 가르침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로 고행을 쌓았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28-29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구법유학

870년(경문왕 11)에는 조공을 바치러 가는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가서 보당사(寶堂寺)에 머물렀다.

얼마 뒤 당나라 의종의 생일에 칙명으로 입궐하여, '불적을 순례하고 법을 깨달은 뒤 귀국'하고자 하는 입당(入唐)의 포부와 목적을 밝혀 의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3]

Quote-left.png 얼마 안 되어 황제의 탄신일에 칙명으로 불러 대궐에 들어갔다. 의종황제(懿宗皇帝)는 교화를 넓힐 지극한 생각으로 삼가 현풍을 추앙하였는데, 대사에게 묻기를 '멀리 바다를 건너와 무슨 구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대사가 칙서에 대답하여 이르기를, '빈도가 다행히 상국(上國)의 문물을 구경하고 중화에 도를 묻게 되었는데, 오늘 외람되이 큰 은총을 입어 성대한 일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라는 것은 신령스러운 자취에 두루 노닐어 적수(赤水)의 보주(寶珠)[4]를 더듬어 찾아보고, 돌아가 우리나라를 빛내 다시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심인(心印)을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천자가 은총을 두텁게 내리고 그 말을 매우 좋게 생각하였으니, 법수(法秀)가 진(晉) 문제를 만나고 담란(曇鸞)이 양(梁) 무제(武帝)를 대한 것과 같아서 고금은 비록 다르지만 이름과 덕망은 한 가지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29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이후 행적은 875년(헌강왕 1) 성도(成都)의 정중정사(靜衆精舍)에 가서 신라승 무상대사(無相大師)의 영당(影堂)에 예배하였고, 다시 청원(靑原) 문하의 석상경제(石霜慶諸)으로부터 심인(心印)[5]을 전하여 받았다. 신라인으로서 청원의 법을 이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 뒤 중국의 선지식(善知識)을 두루 참방하고 조계(曹溪)에 들러 육조탑(六祖塔)에 예배하였다.[6]

Quote-left.png 석상(石霜) 경저화상(慶諸和尙)이 여래의 집을 열고 가섭(迦葉)의 뜻을 베푸니 보리수(菩提樹) 그늘에 참선(參禪)하는 무리들이 모였다는 소리를 듣고, 대사는 은근히 예를 행하고 간절히 정성을 바쳤으며, 그대로 방편(方便)문에 머물러 마침내 마니(摩尼)의 보배를 얻었다, 얼마 후 형악(衡岳)을 찾아 노닐어 선지식(善知識)이 참선하는 거처를 배알하고, 멀리 조계산(曹溪山)에 이르러 6조 혜능(慧能)의 보탑(寶塔)을 배례하였으며, 동산(東山: 5조 홍인의 도량이 있던 산) 홍인(弘忍)의 먼 자취를 가까이 하여 6조의 남은 행적을 찾았으며, 사방 먼 데까지 찾아보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귀국 및 활동

행적은 88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여 다시 통효대사를 모시며 그의 법을 이어받았다.[7]

Quote-left.png 중화(中和) 5년(885, 신라 헌강왕 11)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 때 굴령(堀嶺: 강원도 강릉에 있는 고개. 통효대사 범일이 이 곳에 있었음)에 이르러 다시 통효대사를 배알하였다. 대사가 말하기를 '일찍 돌아온 것이 기쁘며, 서로 보게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후학들은 각기 그 가르침을 받았지만 생각은 여기에 있었구나.'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효공왕이 즉위하자 선종(禪宗)을 중시하여 그를 경주로 불러 국사(國師)의 예로써 대우하였다.[8]

Quote-left.png 효공대왕(孝恭大王)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선종을 존숭하였는데, 대사가 해동에서 으뜸이고 천하에 뛰어나다고 하여 특별히 승정(僧正)인 법현(法賢) 등을 보내 조서를 내리고 대궐로 불렀다. 대사는 문인에게 이르기를, '스스로 선에 편안하려는 것은 마침내 교화를 도우려는 것이다. 우리 도가 말대(末代)까지 전해 내려온 것은 밖에서 보살펴 준 (임금의) 은혜가 있어서이다.' 하였다. 마침내 천우(天祐) 3년(906, 효공왕 10) 가을 9월 초에 시골을 훌쩍 떠나 서울로 돌아왔다. 16일에 이르러 대궐에 들어가 높이 선상에 앉았다. 주상은 미리 마음을 맑게 하고 면복을 똑바로 하고서 국사의 예로 대하며 우러러 진리를 배우겠다는 뜻을 경건하게 폈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907년에는 김해 지방에 가서 그 지역의 유력한 호족세력인 김율희(金律熙)의 후원을 받게 된다.[9]

Quote-left.png 이듬해(907, 천우 5, 효공왕 11) 늦여름에 갑자기 서울을 떠나 바닷가를 따라 잠시 노닐다가 김해부에 이르렀다. 김해부지군부사(金海府知軍府事)인 소충자(蘇忠子: 신라 효공왕 때 김해 지방의 세력가)와 그의 아우로 영군인 율희(律熙)가 옷깃을 여미어 풍화를 흠모하고 가슴을 열어 도를 사모하면서, 명사(名寺)에 머물기를 청하고 창생에게 복을 주기를 빌었다. 대사는 머물 만하다고 여기고 남모르게 자비의 교화를 베푸니 변방에서 요망한 기운을 쓸어버리고 산중에 단 이슬을 뿌렸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915년(신덕왕 4)에는 신덕왕도 행적을 국사로 삼았다. 왕은 행적을 남산의 실제사(實際寺)에 머무르게 하며 대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Quote-left.png 신덕대왕(神德大王)이 왕위를 계승하고 대궐로 들어오라고 불렀다. 정명(貞明) 원년(915, 신덕왕 4) 봄에 대사는 서둘러 참선하는 무리를 거느리고 서울에 이르니, 지난날과 같이 명하여 남산(南山) 실제사(實際寺)에 안거하게 하였다. 이 절은 그 전에 임금께서 즉위하기 전에 거처하던 집을 임금이 되어 절로 만들었는데 대사에게 맡겨 길이 선우(禪宇)로 쓰게 하였다. 이 때 행재소로 대사를 맞아들여 다시 자비로운 얼굴을 접견하고, 이에 가르침을 기대하던 마음을 열어 거듭 무위의 설법을 들었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입적

행적은 실제사를 떠나 돌아가던 길에 여제자인 명요부인(明瑤夫人)의 요청에 따라 석남산사(石南山寺)[10]에 머물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916년(신덕왕 5) 입적하였다.

Quote-left.png 이듬해(916, 신덕왕 5) 봄 2월 초에 대사는 몸이 편치 못함을 알고 작은 병이 들었다고 말하였으며, 12일 아침에 무리에게 고하기를, '삶이란 한계가 있는 것이니 나는 떠나가겠다. 너희는 (법을) 지켜 잃지 말고 힘쓰도록 하라.'하고 승상에 가부좌를 하고서 엄숙히 입적하니 나이는 85세이고 승랍은 61년이었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2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경명왕이 '낭공대사(朗空大師)'이라는 시호와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는 탑호를 내려주고 최인연(崔仁渷)에게 비문의 찬술을 명하였다.

Quote-left.png 금상(경명왕)은 능히 국가의 큰 기틀을 잇고 삼가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선화(禪化)를 존숭하기를 전조(신덕왕)와 다름없이 하여, 시호를 '낭공대사(朗空大師)'라 하고 탑명은 '백월서운지탑(白月栖雲之塔)'이라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3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탑비의 건립

비문은 행적이 입적한 이듬해에 지었으나, 탑비는 38년 만인 954년(고려 광종 5)에야 건립되었다.[11] 당시 남북국시대 말기의 상황이 너무도 어지러워 대사의 탑과 비석을 세울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 같은 사연은 순백이 기록한 탑비 뒷면의 후기에 담겼다.[12]

Quote-left.png 오직 대사(大師)께서 당신라국(唐新羅國) 경명왕 때인 천우(天祐) 연간에 열반에 드셨을 때, 명왕(明王: 경명왕)이 시호와 탑명을 추증하고 이어 최인연 시랑(侍郞)에게 칙명을 내려 비문을 짓게 하였다. 그러나 세상은 복잡하고 인심은 교활하여 뜻있는 일을 하기에 더욱 어려운 시대였다.

그 후 해가 바뀌고 여러 달이 지났지만 비석을 세우지 못하다가, 후고려(後高麗)가 사군(四郡)을 평정하고 삼한(三韓)이 통합됨에 이르러 현덕(顯德) 원년(954, 광종 5) 7월 15일에 태자산에 이 큰 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좋은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Quote-right.png
출처: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5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지식관계망

  •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와 낭공대사 행적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행적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최인연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A ekc:writer B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신라 경명왕 A는 B가 이름을 지었다 A dc:contributor B
범일 행적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경제 행적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사굴산문 범일 A는 B가 개창하였다 A ekc:founder B
행적 합천 해인사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행적 복천사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A edm:isRelatedTo B
행적 강릉 굴산사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행적 신라 효공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행적 신라 신덕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행적 김율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당 의종 행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봉화 태자사 A는 B에 있었다 A edm:formerLocation B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국립중앙박물관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832년 행적이 태어남.
855년 행적복천사에서 구족계를 받음.
870년 행적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남.
906년 신라 효공왕행적국사의 예로 대우함.
907년 행적김율희의 후원을 받아 김해 지방에 머무름.
915년 행적경주 실제사에 주석함.
916년 행적이 석남산사에서 입적함.
917년 신라 경명왕행적의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최인연에게 비문의 찬술을 명함.
954년 행적의 탑비인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봉화 태자사에 건립됨.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김위석, "행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부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경(經)과 그 가르침을 주석·연구·정리·요약한 논(論).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경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김위석, "행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황제가 적수에서 구슬을 잃어버렸는데, 상망(象罔)이 그것을 찾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황제가 적수 북녘에서 노닐고 곤륜산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고 돌아왔는데, 그 때 검은 구슬(玄珠)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아는 것이 많고 눈이 밝고 말솜씨 좋은 세 사람을 시켜 찾게 했으나 찾지 못하고, 무심한 상망을 시켜서 그 구슬을 찾았다고 한다. 즉 도의 유현(幽玄)한 경지를 언어문자나 사리분별을 떠나 무심(無心)의 경계에서 터득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5. 언어를 떠난 깨달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 깨달음. 도장이 진실·확실을 나타내듯, 깨달음도 그러하므로 인(印)이라 함.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심인",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김위석, "행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7. 김위석, "행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김위석, "행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최병헌, "소율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0. 현재 경북 영일군 묘봉산에 있는 석남사로 추측됨.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32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11.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12. 박성원, "위대한 문화유산-태자사 낭공대사비", 네이버캐스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 김위석, "행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지관,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364-403쪽.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 참조: "행적",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임세권 저, 이우태 편저, 「태자사 낭공대사 백월서운탑비」,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한국국학진흥원, 2014, 20-38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17 : 고려1 비문1",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 "행적",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