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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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자비 (集字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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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집자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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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표기 | 集字碑 |
정의
전해 내려오는 글씨를 그대로 응용하여 새긴 비.
내용
개요
집자비(集字碑)는 글씨를 직접 써서 석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써놓은 글씨를 여기저기서 발췌하여 만든 석비다. 그렇기 때문에 글씨를 쓴 서사자는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며 서체의 유형도 조금씩 서로 다를 수 있다. 집자의 효시는 당(唐) 회인(懷仁)이 왕희지(王羲之)의 글자를 집자하여 672년에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를 만든 것이다. 이를 모방하여 한국에서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집자비를 만들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유명한 명필의 글씨를 자본(子本)으로 집자되었는데 시대별, 개인별로 그 취향이 다르다.[1]
통일신라시대
한국의 집자비로는 성교서에서 집자한 무장사아미타여래조상사적비(鍪藏寺阿彌陀如來造像事蹟碑)가 처음이다. 신라 애장왕 즉위 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는 신라 소성왕의 계화부인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2]
고려시대
고려시대 집자비로는 흥법사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와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직지사대장당기비(直指寺大藏堂記碑), 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 등이 있다.[3]
- 흥법사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 진공대사 충담(眞空大師 忠湛)의 비이다. 당 태종의 행서를 집자한 유일한 석비이다.[4]
- 태자사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선사 낭공대사 행적(朗空大師 行寂)의 비이다. 신라 명필 김생(金生)의 행서를 승려 단목(端目)이 집자하였다.[5]
- 직지사대장당기비(直指寺大藏堂記碑)는 직지사(直指寺)에 대장경을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으로 현재 비석은 전해지지 않고 탁본의 판독문이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과 조선후기에 이우(李)가 편찬한『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수록되어있다. 왕희지와 탄연(坦然)의 글씨를 집자하여 쓴 것으로 추정된다.[6]
- 인각사보각국사비(麟角寺普覺國師碑)는 보각국사 일연 (普覺國師 一然)의 비이다. 죽허(竹虛)가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였다.[7]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집자비는 18~19세기에 유행하였으며 서체가 다양해 졌다. 김생(金生)·최치원(崔致遠)·한호(韓濩)와 왕희지(王羲之)·안진경(顔眞卿)·회소(懷素)·소식(蘇軾) 등의 글씨를 집자하였다.[8]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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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 | 집자비 | A의 유형은 B이다 | A dcterms:type B |
봉화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 집자비 | A의 유형은 B이다 | A dcterms:type B |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 집자비 | A의 유형은 B이다 | A dcterms:type B |
시각자료
주석
- ↑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집자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 "한국의 집자비", 금석문이해하기,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