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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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원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0월 12일 (목) 01:1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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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義天)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順天 仙巖寺 大覺國師 義天 眞影)[1]
대표명칭 의천
영문명칭 Uicheon
한자 義天
생몰년 1055년(문종 9)-1101년(숙종 6)
시호 대각국사(大覺國師)
우세(祐世)
후(煦)
법호 석후(釋煦), 의천(義天)
의천(義天)
성씨 왕씨(王氏)
속명 왕후(王煦)
출신지 경기도 개성
승탑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승탑비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의천은 1055년 고려 왕실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 제11대 왕인 문종(文宗)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 이씨(仁睿王后 李氏)로, 의천은 넷째 아들이다.[2]

Quote-left.png 국사는 우리 태조대왕의 4세손이며, 또한 문종 임금의 넷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니, 어느 날 밤 꿈에 용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그리하여 을미년((1055년) 9월 28일에 이르러 궁중에서 탄생하였다. 그 때 향기가 궁 안에 가득하여 오랫동안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39-140쪽.


Quote-left.png 국사는 문조(文祖)의 넷째 왕자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仁睿太后)이다. 휘는 석후(釋煦)요, 자는 의천(義天)이다. 이성(二聖)이 국사와 더불어 숙세(夙世)로부터 숙연(夙緣)을 심어 묘하게 부(父) 모(母) 자(子)의 인연(因緣)이 일시에 계합하였다. 국사는 날 때부터 특이함이 있었으며, 점점 장성하면서 예능을 행함이 마치 성인(成人)과 같았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인동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93쪽.


출가수행

의천은 1065년 5월 11세의 나이로 영통사(靈通寺)에서 화엄종(華嚴宗) 승려인 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에게 출가하였으며, 같은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1066년 난원이 입적하자 의천은 법형제인 창원(昶元), 이기(理琦) 등의 승려들의 지도를 받았다.[3]

Quote-left.png 어느 날 문종 임금께서 모든 왕자를 불러 놓고, “누가 능히 스님이 되어 복전(福田)으로 국조(國祚)와 국민의 이익을 위하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국사께서 일어나 여쭙기를, “신이 출가 수도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오직 원하옵건대 허락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임금이 말하되, “좋다” 고 윤허하였다. 어머니인 인예태후가 이 말을 듣고 태몽과 부합한다고 생각하나, 학업을 마친 다음 부왕의 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떨까 하였으나,어찌할 수 없었다. 을사년 5월14일 경덕국사(景德國師)를 내전으로 초정하여 은사가 되어 삭발 수계(受戒)토록 하였다. 이 때 문종이 재배하고 경덕국사를 따라 궁중에서 영통사에 있게 하였다. 그 해 10월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 가서 구족(具足)을 받았으니 당시 나이 11살이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학문을 쉬지 아니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40쪽.


Quote-left.png 11세 때 문종(文宗)의 숙지(宿志)를 받들어 경덕국사(景德國師) 난원(爛圓)을 은사(恩師)로 하여 삭발염의(削髮染衣)하고 사미계를 받았다. 그로부터 현수교관(賢首敎觀)인 『화엄경』을 수학(受學)하다가 경덕국사가 입적(入寂)한 후에도 그 도제(徒弟)와 더불어 강학(講學)을 중지(中止)하지 않았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인동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93쪽.


의천은 불교 서적뿐만 아니라 유학·사기·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독서를 거쳐 출가한 지 3년 만에 수계(受戒)에서 최고의 승계인 승통(僧統)에 올랐으며[4] , 우세(祐世)라는 호를 하사받았다.[5]

Quote-left.png 나이 장년에 이르러서부터 더욱 스스로 근고 정진(勤苦精進)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고 부지런히 골골(矻矻)하여 많은 책을 열람하고 억세게 기억하였다. 그러나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도덕이 높은 이가 있으면 지체없이 찾아가서 문학(問學)하였다. 현수교관(賢首敎觀)으로부터 돈점(頓漸)과 대소승(大小乘)의 경율론(經律論)에 따른 장소(章疏)에 이르기까지 탐색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고 여력(餘力)으로 외학(外學)에 대해서도 견문이 연횡(淵橫)하여 중니(仲尼)와 노염(老聃)의 서적과 제자백가의 집록(集錄), 모든 사기(史記)까지도 또한 일찍부터 그 청화(菁華)함을 완미(玩味)하여 그 근저를 찾아냈으므로 의론이 종횡으로 치빙(馳騁)하고 곤곤(滾滾)하여 그 끝이 없었다. 비록 노사(老師)와 숙덕(宿德)이더라도 모두 스스로 따라갈 수 없다고 자인하였다. 칭송하는 그 명성이 온 천하에 널리 들려서, 당시 사람들이 국사를 일컬어 불법 문중(佛法門中)에 최고의 종장(宗匠)이라고 하였다. 정미년 7월(1067년) 을유에 문종이 교서를 내려 포창하고 우세 승통(祐世僧統)이란 승직(僧職)을 하사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41-142쪽.


Quote-left.png 널리 모든 종파를 회통(會通)하니 학자들이 함께 모여 강론(講論)함에 있어 무릇 얻은 바가 초월하고 비범하여 마치 노사(老師) 또는 구참(久叅)과 같이 여러 종파와 다방면에 걸쳐 정통(精通)하지 않음이 없었다. 문조(文祖) 23년(1069년)에 우세(祐世)라는 호를 하사하고 승통직(僧統職)을 내렸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인동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93-194쪽.


구법유학

의천은 1084년부터 중국 송나라로의 유학을 추진하였다. 의천은 부왕인 문종에게 유학의 뜻을 전했으나, 선종 때까지 유학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결국 1085년 의천은 국왕과 모후인 인예왕후에게 표문(表文)을 남기고는 송의 상선(商船)을 타고 밀항을 함으로써 유학에 나섰다. 의천이 송나라에서 만난 고승으로는 화엄종(華嚴宗)의 정원(淨源)·유성(有誠), 선종(禪宗)의 종본(宗本)·요원(了元)·회련(懷璉), 서천범학(西天梵學)의 천길상(天吉祥), 천태종의 자변종간(慈辯從諫), 율종(律宗)의 원조(元照)·택기(擇基) 등으로, 50여 명에 달하는 고승들을 만나 동아시아 불교의 과제를 토론하면서 고려 불교의 위상을 거시적으로 파악하였다.[6]

1085년 4월부터 1086년 6월까지 약 14개월 동안 송나라에서의 의천의 구법활동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의천의 송나라 체재(滯在) 일정[7]
시간 내용
1085년 정월 내전(內殿)에 들어가 송나라 구법을 간청.
군신이 의논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음.
1085년 4월 경오 밤 선종과 태후에게 편지를 남겨 놓고 제자 수개(壽介)를 데리고 미복(微服)으로 정주(貞州)로 가서 상인의 배를 타고 출발.
선종이 이를 듣고 관료를 선발해 낙진(樂眞), 혜선(慧宣), 도린(道隣) 등의 제자들과 따라가도록 함.
1085년 5월 2일 송나라 밀주(密州) 판교진(板橋鎭)에 도착.
밀주(密州)의 지주(知州)인 범악(范鍔)을 통해 송나라 화엄종과 화엄학에 대해 공부를 하기 위해 오게 됐다는 상소를 올림.
의천의 상소를 받은 철종은 바로 명령을 내려 의천의 목적에 부응할 적당한 스승을 물색하도록 했고, 유성법사(有誠法師)를 의천의 스승으로 선정함.
1085년 5월 21일 철종이 주객원외랑(主客員外郞) 소주정(蘇注廷)에게 명령하여 안내하도록 함.
1085년 6월 7일 해주(海州)에서 철종이 내시성(內侍省)의 황영석(黃永錫)을 보내 칙지(勅旨)와 음식을 하사.
1085년 6월 13일 철종이 중사(中使)를 보내 칙지(勅旨)와 음식 하사.
1085년 7월 1일 남경(南京)에서 중사(中使)를 보내 칙지(勅旨)와 음식 하사.
1085년 7월 6일 변경(汴京) 도착.
변경(汴京) 교외에서 환영하고 변경(汴京)의 계성사(啓聖寺)로 들어감.
중서사인(中書舍人) 범백록(范百祿)이 주관하여 며칠 후 철종이 수공전(垂拱殿)에서 만나보고 손님의 예로 대접.
1085년 7월 21일 계성원에서 중서사인(中書舍人) 전협(錢勰)을 보내 환영연 주최.
1085년 8월 철종에게 항주(杭州)로 가서 정원(淨源)에게 사사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표를 올리자 조산랑상서주객원외랑(朝散郞尙書主客員外郞) 양걸(楊傑)을 보내 안내하게 함.
변경(汴京)을 떠나 변수(汴水)를 따라 회사(淮泗)를 거쳐 항주(杭州)로 여행.
1085년 9월 항주(杭州)에 도착하여 정원(淨源)이 주석하던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를 찾아 정원(淨源)을 만남.
주본(周本) 『화엄경』을 함께 읽기 시작.
1086년 1월 항주(杭州) 지주(知州) 포종맹(蒲宗孟)의 초청으로 정원(淨源)이 남산(南山) 혜인원(慧因院)으로 들어감.
정원(淨源)은 전에 주석하던 곳에 각각 현수(賢首)의 교장과 조사상을 모셨는데, 이곳에도 다시 모시고자 했지만 할 수가 없었음. 양걸(楊傑)이 그런 뜻을 알고는 지주(知州) 등과 함께 애를 써서 일을 처리함. 의천이 은을 회사하여 교장(敎藏) 7,500여 권을 모셨고, 귀국한 뒤에는 다시 금으로 쓴 화엄경 삼본을 모셔서 성수(聖壽)를 빌었음. 혜인원(慧因院)은 본래 선원(禪院)이었는데, 강원(講院)으로 바꾸고 특별히 세금까지 면제해 주었으니 조정에서 승통을 위해서 한 일임.
1086년 1월 선종이 송의 철종에게 모후 인예태후의 걱정을 들어 의천의 귀국을 종용해달라고 요청.
당시 의천은 천태종의 종간(從諫)과 함께 천태종의 문헌을 공부하고 있었음.
종간(從諫)의 권유로 귀국을 결심하고 철종의 조서에 따라 변경(汴京)으로 올라감.
정원(淨源)과 함께 화엄경을 읽고 있던 때여서 정원(淨源)에게 함께 배를 타고 가자고 청하여 공부가 계속 이어질 수 있었음.
1086년 윤 2월 13일 변경(汴京)에 들어가자 영령선원(永寧禪院)에서 위로연을 베풀고, 동문관(同文館)에 쉬게 하고 조산랑시중서사인(朝散郞試中書舍人) 만중행(滿中行)을 관반사(館伴使)로 보냄.
철종을 뵙고 닷새를 머문 뒤 하직 인사를 올림.
1086년 3월 2일 변경(汴京)을 떠날 때 양걸(楊傑)을 수행원으로 보내 안내하도록 함.
1086년 3월 7일 철종이 의천의 부왕인 문종의 초상화를 내려 위로.
1086년 4월 변경(汴京)을 떠나 내려오는 길에 수주(秀州) 진여사(眞如寺) 능엄대사탑(楞嚴大師塔)에 들러 참배하고, 탑정(塔亭)이 허물어진 것을 보고 금을 시주하여 고치도록 함.
1086년 4월 혜인원(慧因院)으로 돌아와 정원(淨源)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고 신표(信標)로 경서(經書)와 향로 불자(拂子)를 받음.
이는 특별히 의천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정원(淨源)을 도와 도(道)가 증진되도록 한 것임.
1086년 4월 항주(杭州)를 떠난 명주(明州)로 가는 도중에 천태산(天台山)에 들러 지자대사(智者大師)의 탑에 참배하고 친히 발원문을 써서 귀국하여 천태종을 전할 것을 서원함.
양걸(楊傑)이 이를 기록하고 중립(中立) 스님이 비석에 새겨 기념함.
1086년 5월 명주(明州)에 도착.
1086년 5월 19일 정해(定海) 항에서 귀국하는 고려의 조하사(朝賀使) 사신단과 합류하여 귀국길에 오름.
1086년 5월 29일 정해항을 떠난 지 열흘만에 예성강을 통해 귀국. 국경에 이르러 죄를 사죄하는 표를 바침.

귀국 및 활동

의천은 1086년 6월 귀국하여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었다. 1087년에는 송나라의 정원(淨源)에게 세 가지 종류의 <화엄경(華嚴經)> 한역본 180권과 이 경전을 보관할 장경각 건립비를 보냈다. 이에 정원은 혜인사(慧因寺)에 '화엄각(華嚴閣)'이라는 이름의 장경각을 지어 경전을 보관했으며, 이 때부터 혜인사는 고려사(高麗寺)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였다.[8]

Quote-left.png 상서 좌승 포공이(법사가) 어렵게 불법에 뜻을 두어 수행과 학문이 높고 깊은 것에 감탄하여 상소를 올려 혜인선원을 교원으로 바꾸도록 하고 법사를 모셔 주석하도록 했다. 조사상과 성현들의 그림을 조성하고, 법구들을 갖추었으니 모두 포공과 관직에 있는 분들이 힘을 합해 이룬 일이었다. 육백 함에 달하는 여러 부의 교장은 의천이 갖춘 것이었다. 의천이 돌아간 뒤에 다시 금으로 쓴 화엄경 세 가지 번역본 170권을 금으로 만든 축에 상아를 끼우고 화려하게 포장하여 법사에게 보내 황제의 성수를 빌었다. 사람들이 현수의 교관이 규봉에 이르러 끊어지고 말았는데 오늘처럼 번성한 적이 없었다고들 했다. Quote-right.png
출처: 「송항주남산혜인교원(宋杭州南山慧因敎院) 진수법사비(晉水法寺碑)」, 『혜인고려사지(慧因高麗寺志)』, 151~154쪽.[9]


또한 의천은 1090년에 경(經)ㆍ율(律)ㆍ논(論)의 삼장(三藏)에 관한 주석서인 장소(章疏)를 수집하여 그것들의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편찬하였고, 1091년에 흥왕사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따라 본격적으로 교장(敎藏)을 간행하였다.[10]

Quote-left.png 태불강고(怠不講故)로 관저(官褚)와 사저(私褚)를 모두 털어서 재차(再次)에 걸쳐 중국, 거란, 일본 등지로부터 경서를 구입하였다. 또 신미년 봄 남방으로 다니면서 수색하여 얻은 책이 무려 4,000권에 달하였으나, 대부분 먼지로 얼룩져서 글자가 희미하거나, 좀이 먹어백공천창(百孔千瘡)일 뿐 아니라 책장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고 단괴(斷壞)되어 어그러진 것들이다. 이를 모두 수합하여 궤중(軌中)에 담아가지고 개성으로 돌아와서 흥왕사에 교장사(敎藏司)를 설치하고 명유학자(名儒學者)를 소집하여 유결(謬缺) 부분을 교정 보완하고, 그를 모두 연참(鉛槧)하여 몇 년만에 문집이 대비되었으므로 학자들이 기꺼히 의뢰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50-151쪽.


이후 의천은 1094년에 홍원사(洪圓寺)에서 주석하였으며, 같은 해 5월에는 갑자기 해인사로 퇴거하여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는 뜻을 표했다. 그러나 1095년 숙종이 즉위하자 그의 간청으로 다시 흥왕사로 되돌아왔다.[11]

Quote-left.png 갑술년 2월 초에 홍원사(洪圓寺)로 옮겼으나, 그의 교학진작은 옛과 같았다. 흥왕사에 주석하던 초기에 맏형인 순종이 병세가 위독하여지므로 국사를 불러 이르기를, “과인이 일찍부터 대가람을 창건하여 사액을 홍원사로 하기를 발원하였으나, 지금 나의 병세가 위독하여 이를 성취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니, 만약 내가 죽고 차자인 운(運 : 宣宗) 이 왕위를 계승하거든 나의 소원을 잊지 말고 승통도 동심협력(同心協力)하여 이 불사를 회향(回向)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순종으로부터 당부를 받은 국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감히 심력(心力)을 다하고 죽는 한이 있어도 변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다짐하였다. 그 후 홍원사가 낙성됨에 국사를 주지로 임명하였다. 40세 때인 1094년 5월 복잡한 개경(開京)을 벗어나 해인사로 퇴거하여 계산(溪山)과 더불어 자적하였다. 호연한 기백으로 지내면서 여기서 이 세상을 마치려는 ‘종언지지(終焉之志)’를 가졌다. 조카인 헌종(獻宗)이 두 차례에 걸쳐 개성으로 되돌아오도록 청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을해년 10월 8일 셋째 형인 숙종(肅宗)이 즉위해서도 수차례에 걸쳐 친서를 보내 개경으로 돌아오도록 하였으나 굳게 사양하였다. 그러나 또 교서를 보내 이르기를, “스님께서 왕도(王都)로 돌아오시기를 바라는 불곡(不穀)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간절합니다. 오직 고산(高山)의 경행(景行)과 오매(寤寐)의 증상(增想)일 뿐 아니라 겹합(鵊鴿) 재원(在原)과 같이 의리를 존중하는 것이지 다른데 뜻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과인(寡人)이 직접 가서 뵙지는 못하고 여러 번 성청(誠請)하여 고적(高跡)에 불의(拂衣)하였으나 일찍부터 과인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옛 성인들은 비이비혜(非夷非惠)하고 시속(時俗)과 더불어 권서(卷舒)가 무애(無礙)하였으니, 바라건대 한 번 와서 나의 뜻에 부합(副合)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는 내용이었다. 국사는 이 교서를 보고 번연히 이르기를, “정중한 예를 갖추어 후사(厚辭)함에는 그 의리(義理)를 거역할 수 없다” 하고, 곧 바로 개경으로 돌아가서 다시 흥왕사에 주석하면서 교학진흥(敎學振興)은 여전히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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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51-152쪽.


의천흥왕사에 주석하면서 학문에 몰두하는 한편, 왕의 자문에 응하여 정무에 관한 방책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화폐론으로 의천은 숙종에게 화폐 사용의 이로움을 건의하였으며, 1102년 해동통보(海東通寶)가 제조되어 사용되었다. [12]

Quote-left.png 대저 쌀을 화폐로 삼을 때에는, 원근의 무역에서 운반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가볍게 수량만 써도 될 것인데도, 무겁게 천균을 허비하곤 합니다. 혹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쌀을 모아서 운반할 경우, 말 한 마리에 실을 수 있는 것이 2석에 지나지 않고 걸핏하면 열흘을 넘기기 일쑤이므로 사람이나 말이나 벌써 힘이 절반은 소모되고 맙니다. 또 혹한기나 혹서기에 소나 말이 없는 빈민이 직접 등에 지고서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가다가 길가에 쓰러지곤 하는데, 이 어려움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 엽전을 사용하면 등에 지거나 우마에 싣고 가는 고통을 면하게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첫 번째 이로운 점입니다. Quote-right.png
출처: 의천, 이상현 역, "화폐의 사용을 왕에게 건의한 글", 「대각국사문집」제12권, 『한글불교전서 고려5: 대각국사집』, 245쪽.


1097년 국청사(國淸寺)가 완공되자 숙종은 경찬도량(慶讚道場)[13]을 베풀었고, 같은 해 5월 의천국청사(國淸寺)의 주지로 삼았다. 국청사(國淸寺)의 창건은 천태종의 개창을 전제로 한 것으로, 의천은 이 절에서 처음으로 천태학을 강설하였다.[14] 천태종은 개창 무렵 1,000여 명의 승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왕의 명으로 천태종에 흡수된 승려 700여 명과 직접 의천의 문하로 찾아온 승려 300여 명 등 도합 1,000여 명에 달하는 승려로 구성되었다고 한다.[15]

Quote-left.png 정축년 5월 국청사(國淸寺)주지에 취임하여 최초로 천태교학(天台敎學)을 강설하였으나, 이 종파가 과거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지만 중간에 폐멸(廢滅)되었다. 그리하여 국사께서 스스로 전당(錢塘) 에 가서 도(道)를 문학하고 천태불롱(天台佛隴)에서 천태종지를 전래하여 중흥하기로 서원(誓願)을 세운 이후로는 하루도 이 서원을 마음에 잊은 적이 없다. 인예태후가 이 소식을 듣고 마음에 기꺼워하여 이 절을 경영하기 시작하였고, 숙종이 즉위하여 이 창건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낙성하였다. 국사는 이 때에 천태교문(天台敎文)에 의하여 교리를 나타내며, 그 교리를 연구하여 모두 깨닫게 하였다. 그러므로 삼지(三止)와 삼관(三觀)이 원명(圓明)하고 언어와 묵언(黙言)이 자재하여 경서만 믿고 고수하려는 집유(執有)의 생각을 발진(拔盡)하고 악견(惡見)으로 공(空)을 취하는 집착을 파(破)하는 중도(中道)를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에 학자(學者)가 국사의 성애(聖涯)를 첨앙하여 옛 것을 버리고 스스로 천태종(天台宗)으로 찾아오는 스님이 1,000명이나 되었다. 왕성한 지라! 세상에서 천태종을 논하는 자들이 국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백세에 불천(不遷)하는 종지(宗旨)라 하였으니 어찌 신행(信行)하지 않겠는가” 라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52-153쪽.


Quote-left.png 태후(太后)께서 예전에 세웠던 대원(大願)을 다시 발하여 가감(伽監)을 창건하여 국청사(國淸寺)라 이름하고 불교를 크게 선양(宣揚)하여 진행(進行)하다가, 대원(大願)이 이루지지 못하고 1083년에 선가(僊駕)께서 상천(上天)하고 숙조(肅祖)가 왕위를 계승하고 건축불사를 계속하여 공사가 끝난 다음, 국사를 청하여 주지(住持)를 겸임하게 하였다.

국청사의 낙성법회(落成法會)에 법가(法駕)께서 친히 행림(幸臨)하시고, 천태일종(天台一宗)의 학자와 모든 종파의 석덕(碩德)들이 무려 수천명이 국사의 도풍(道風)을 들으려고 모여왔다. 국사께서 법좌(法座)에 올라앉아 해조음(海潮音)을 떨쳐 미증유법(未曾有法)인 일종묘의(一宗妙義)를 연설하시니, 무상근기(無上根機)는 다분히 중도(中道)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터득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인동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204-205쪽.


또한 1101년에 의천봉은사(奉恩寺)에서 천태종의 승려 선발시험인 천태 대선(大選)을 실시하였는데, 천태종의 경론(經論) 120권으로 시험하여 40여 명의 승려를 선발하였다.[16]

Quote-left.png 건통(乾統) 원년(元年) 신사(辛巳)에 대각국사가 비로소 천태의 굉강(宏綱)을 거양(擧揚)하면서, 우수한 학자 일백명을 뽑아 봉은사(奉恩寺)에 있게 하고, 천태종의 경론(經論) 일백이십권으로써 고시(考試)를 보아 현량(賢良) 사십여인(四十餘人)을 선발하였으니, 선국(先國)의 초기에 대행(大行)하였던 조계(曹溪)·화엄(華嚴)·유가(瑜伽)·궤범(軌範)등으로 더불어 같았으므로, 세상에서 이를 일러 사대업(四大業)이라 하였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인동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209-210쪽.


입적

1101년 의천은 개성의 총지사(摠持寺)에서 병으로 47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다. [17] 다비한 뒤 유골을 수습하여 영통사 동쪽 산에 탑을 만들어 안치했으며, 숙종은 의천을 국사(國師)로 봉하고 대각(大覺) 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8]

Quote-left.png 8월에 이르러 병을 만나 궤상(几床)에 편안히 기대고 앉아 관심(觀心)을 하다가 때로는 지경(持經)도 하여 피로하다고 하여 스스로를 중지하지 않았다. 문인들이 불사(佛事)를 하겠다고 요청하면 말하되, “부처님을 섬긴지 이미 오래 되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중사(中使)를 시켜 법체(法體)의 안후(安候)를 문안하고 명의(名醫)와 처방을 보내어 보의(寶衣)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모든 사찰로 하여금 국사의 건강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게 하고 왕이 직접 찾아와서 위문하여 이르되, “불가휘(不可諱)의 일이 있을까 두려우니 원컨대 하고자 하는 바에 대하여 말씀해 달라” 고 하였다. 국사가 이르기를, “나의 소원은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것이나 병이 나의 뜻을 뺏어 갔으니 엎드려 바라는 바는 왕께서는 지성으로 불교를 외호하여 여래의 유교에 부합하면, 이는 죽어도 썩지 않는 불멸의 공덕이라” 하고, 10월 5일 임진에 우협으로 누워 입적하시니 세수는 47이요, 승랍은 36세였다. 이에 앞서 어느 날 보당(寶幢)이 땅에서 무너지면서 꺾어지는 꿈을 꾸기도 했다. 임금께서 부음을 듣고 통곡하시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의를 보내게 하는 한편, 국사를 책봉하고 시호를 대각이라 추증하고는, 16일 계묘에 다비(茶毘)하여 유골을 수습하고, 11월 4일 신유에 오관산 영통사의 진방(震方)에 안적(安庴)하였으니, 이는 본교(本敎)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54-155쪽.


Quote-left.png 국사가 입적(入寂)함에 책서(冊書)를 보내 국사(國師)로 봉하고 시호를 대각(大覺)으로 추증하였다. 이 보다 앞서 이미 숙종이 대각이란 이자(二字)로써 국사의 호를 삼으려 하였으나, 국사가 간절히 사양하기를, “대각은 부처님의 덕칭(德稱)이어늘, 어찌 감히 외람되게 의거(依據)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끝내 받아들이지 아니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유사(有司)로 하여금 국사의 시호(謚號)를 논의케 하였으나, 역시 대각이란 이 이자(二字)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옛날 영공(靈公)이 죽어서 사구(沙丘)에 묻으려고 땅을 파던 중 석곽(石槨)이 나타났는데, 다음과 같은 명(銘)이 새겨져 있었다. “영공이 탈취(奪取)하여 묻힐 것이다”라 하였으니, 대저 영공이 다시 영공이 된 것이 이미 오래라고 하였다. 이런 사실로써 관찰하여 보건데, 이제 국사가 또한 대각이 된 것이 이미 오래라고 하겠다. Quote-right.png
출처: 이지관, "인동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206쪽.


의천의 탑비는 의천의 입적으로부터 약 30년 후에 제작되었다.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는 1125년 김부식(金富軾)이 왕명을 받아 찬술하고 1133년 개성 영통사에 건립한 것으로, 의천의 화엄종 계통 문도들이 주도하여 건립하였다.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는 1131년 임존(林存)이 왕명을 받아 찬술하고, 1137년 칠곡 선봉사에 건립한 것으로, 의천의 천태종 계통 문도들이 주도하여 건립하였다.[19]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의천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의천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의천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A ekc:isStupaOf B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칠곡 선봉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 순천 선암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 개성 영통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순천 선암사 의천 A는 B가 중창하였다 A ekc:renovator B
의천 개성 영통사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난원 개성 영통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난원 의천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정원 의천 A는 B의 스승이다 A ekc:hasDisciple B
고려 문종 의천 A는 B의 아버지이다 A ekc:hasSon B
의천 개성 흥왕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교장도감 의천 A는 B가 설치하였다 A ekc:founder B
교장 의천 A는 B가 저술하였다 A dcterms:publisher B
교장 교장도감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의천 항주 고려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055년 의천 출생
1065년 5월 의천 출가. 경덕국사 사법승.
1065년 10월 불일사에서 구족계 받음.
1067년? 1069년? 의천은 문종으로부터 우세라는 호와 승통의 직위를 하사받음.
1085년 의천 송나라 유학
1086년 의천 송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 흥왕사의 주지가 됨.
1090년 의천신편제종교장총록을 저술함.
1091년 의천흥왕사교장도감을 설치함.
1094년 2월 홍원사의 주지가 됨.
1094년 5월 해인사에 안거함
1095년 흥왕사로 돌아옴
1097년 국청사의 최초의 주지가 됨
1101년 천태종의 승려 선발시험인 승선을 실시함
1101년 10월 의천 입적
1137년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건립

시각자료

타임라인

사진

영상

주석

  1.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2. 고려 제12대 왕 순종(順宗, 재위 1083년), 제13대 선종(宣宗, 재위 1083~1094), 제15대 숙종(肅宗, 재위 1095~1105)은 모두 문종과 인예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의천의 친형이다.
  3. 허흥식, 「의천의 사상과 시련」, 『예문동양사상연구원총서2: 한국의 사상가 10人 - 의천』, 예문서원, 2002, 329쪽.
  4. 허흥식, 「의천의 사상과 시련」, 『예문동양사상연구원총서2: 한국의 사상가 10人 - 의천』, 예문서원, 2002, 329쪽.
  5. 의천이 문종으로부터 호와 직위를 하사받은 시기에 대해 비문에 따라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에는 1069년으로 되어 있고,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비에는 1067년으로 되어 있다.
  6. 허흥식, 「의천의 사상과 시련」, 『예문동양사상연구원총서2: 한국의 사상가 10人 - 의천』, 예문서원, 2002, 332-333쪽.
  7. 다음의 표는 '오윤희, 『일꾼 의천』, 불광출판사, 2012.'에서 106-108쪽과 142쪽에 수록된 표를 종합하여 정리하였다.
  8. "의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9. 오윤희, 『일꾼 의천』, 불광출판사, 2012, 166쪽.
  10. "교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장휘옥, 「의천의 천태장 개창 재고」, 『예문동양사상연구원총서2: 한국의 사상가 10人 - 의천』, 예문서원, 2002, 222쪽.
  12. 조명기, 「대각국사의 천태의 사상과 속장의 업적」, 『예문동양사상연구원총서2: 한국의 사상가 10人 - 의천』, 예문서원, 2002, 104쪽.
  13. 이종익, "도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4. 김상현, 「의천의 천태종 개창 과정과 그 배경」, 『예문동양사상연구원총서2: 한국의 사상가 10人 - 의천』, 예문서원, 2002, 284-285쪽.
  15. 김상영, "조계종의 역사와 통합종단 출범의 의의(3)", 『불교닷컴』, 작성일: 2012년 5월 7일.
  16. 김상현, 「의천의 천태종 개창 과정과 그 배경」, 『예문동양사상연구원총서2: 한국의 사상가 10人 - 의천』, 예문서원, 2002, 287쪽.
  17. "의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18. 장휘옥, 「의천의 천태종 개창 재고」, 『예문동양사상연구원총서2: 한국의 사상가 10人 - 의천』, 예문서원, 2002, 222쪽.
  19. 최연식, 「〈大覺國師碑〉의 건립과정에 대한 새로운 고찰」, 『한국사연구』제83호, 한국사연구회, 1993, 39쪽.
  20. 사진출처: 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대백과』, 2008. 온라인 참조: "영통사대각국사비", 조선향토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1. 사진출처: "대각국사 묘지석",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국립중앙박물관.
  22. 사진출처: "선암사 소장 가사·탁의",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참고문헌

  • 오윤희, 『일꾼 의천』, 불광출판사, 2012.
  • 이병욱 편저, 『예문동양사상연구원총서2: 한국의 사상가 10人 - 의천』, 예문서원, 2002.
  • 의천, 이상현 역, 『한글불교전서 고려5: 대각국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2.
  • 이지관, "개성 영통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16-178쪽.
  • 이지관, "인동 선봉사 대각국사 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3,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6, 180-214쪽.
  • 박윤진, 「大覺國師 義天 ‘傳記’의 유형별 기재방시과 특징」, 『한국사학보』48, 고려사학회, 2012, 161-190쪽.
  • 박용진, 「의천의 宋 天台敎學 交流와 天台敎觀」, 『한국학논총』34,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0, 583-615쪽.
  • 박용진, 「義天의 華嚴 門徒와 그 思想傾向」, 『중앙사론』25, 한국중앙사학회, 2007, 1-31쪽.
  • 채상식, 「義天의 불교통합 시도와 그 추이」, 『한국민족문화』57,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 2015, 175-205쪽.
  • 최기표, 「僊鳳寺 大覺國師碑의 의문점」, 『불교학 리뷰』3,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2008, 89-103쪽.
  • 최연식, 「〈大覺國師碑〉의 건립과정에 대한 새로운 고찰」, 『한국사연구』83, 한국사연구회, 1993, 37-55쪽.
  • 최연식, "선봉사 대각국사비", 『한국금석문집성』제23권, 한국국학진흥원, 2014.
  • 한기문, 「高麗時期 天台宗 南崇山門의 成立과 思想的 傾向」, 『역사교육논집』50, 역사교육학회, 2013, 347-372쪽.
  • "문종 왕자 대각국사 왕후", 『高麗史』 列傳(3), 宗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 "의천",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서윤길, "의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