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의천이 송 정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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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재형 기자(법보신문)

고려 의천이 송 정원에게

Quote-left.png 지난해 2월에 쓰신 편지 한 통과 손수 지으신 책을 받아들고 돌아와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법사께서는 제게 언어의 밖에서 종지(宗旨)를 터득한 그 뜻이 나의 마음과 같다며, 바람을 타고 와서 입으로 말하고 마음으로 전할 수 있다면 하늘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겨자씨를 맞히는 듯 기쁨이 클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 문하에 들어올 것을 권면하셨기에 당장 달려가 뵙고 싶지만 감히 그럴 여건이 못 되기에 그저 탄식만 하며 만나 뵐 수 있는 인연이 이뤄지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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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의 마음을 헤아린 선종

1085년 정월, 고려 13대 왕 선종(宣宗, 1049~1094)은 동생 의천(義天, 1055~1101)의 절망감을 알 것 같았다. 동생은 오래 전부터 송(宋)으로 건너가 공부하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매번 그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선종의천이 송나라 유학에 뜻을 두었음을 일찌감치 알았다. “비록 경론이 갖춰졌더라도 그것을 풀어 쓴 해설서[章疏]가 없다면 법을 펼 길이 없다”던 의천이 19살 때 교장(敎藏) 수집을 발원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또 교(敎)를 중시하는 이들은 선(禪)을 외면하고 선을 행하는 이들은 교를 무시하면서 대립하는 고질적인 교단 문제를 천태 사상에서 해결하려 한다는 것도 알았다.

선종의천의 뜻을 받아들여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신들의 반대가 거셌다. 송과 요(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왕자가 송으로 건너가면 심각한 외교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어머니 인예왕후(?-1092)도 아들을 낯선 땅으로 보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선종이 아무리 임금이라지만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깊은 절망으로 괴로워할 동생을 위로해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서로를 알아본 의천과 정원

송의 최고 화엄학자 정원

하지만 의천은 절망에만 빠져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내면에서는 구법의 염원이 더욱 깊어졌다. 그 배경에는 당대 송의 최고 화엄학자인 진수정원(晋水淨源, 1011-1088)과의 인연이 있었다. 의천은 고려와 송을 오가던 무역상의 소개로 정원을 처음 알게 됐다. 정원화엄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송 불교계의 주류로 떠오른 천태(天台)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정원의천의 안목과 열정을 단번에 알아봤다. 정원의천에게 편지를 썼다.

"대저 사람의 몸에는 동서남북의 차이가 있어도 불성에는 원근과 피차의 간격이 없습니다. 그대의 영특한 자질을 가지고 학문에 더욱 노력해 끊임없이 근행(勤行)한다면 어느 경지인들 이르지 못하겠습니까."

둘은 오래지 않아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다. 의천정원의 도움으로 고려에 없는 많은 책을 구할 수 있었다. 의천도 당무종의 회창폐불(會昌廢佛, 841-846)을 겪으며 소실된 화엄관련 서책 46권을 정원에게 보내주었다. 이에 정원은 감사의 표현과 더불어 자신이 손수 지은 책들을 보내왔다.

정원의 저술을 읽은 의천은 감탄했다. 그는 정원이 평생 두 번 만나기 어려운 선지식임을 새삼 깨달았다. ‘늙음과 질병이 함께 몰려오건만, 산과 바다로 멀리 가로막혀 만날 수가 없으니 그 한스러움을 어디에 비하겠소?’라고 답장해 온 75살의 노승. 의천은 정원이 세상과의 연을 접기 전에 반드시 만나겠다고 다짐했다.

밀입국한 고려 왕자의 구법

왕과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친 의천은 마지막 선택의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았다. 더 이상 머뭇거리다가는 송나라 유학이 한갓 꿈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터였다. 1085년 4월7일, 그는 예성강 하구의 정주(貞州)로 향했다. 왕명이나 모정도 더 이상 그의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그는 송 상선에 올라탔다.

한 달 뒤 의천은 거센 파도를 넘어 송 판교진(板橋鎭)에 도착했다. 고려 왕자가 송에 밀입국한 사실이 알려지자 송 조정은 깜짝 놀랐다. 당장 추방하거나 가둘 수 있는 막중한 죄였다. 허나 황제 철종은 의천을 국빈으로 맞이했다. 왕족 출신의 승려가 불법을 위해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온 것도 가상했지만 이를 통해 고려인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호기로 보았다.

의천은 여러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법을 물었고 때로는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화엄종 승려를 비롯해 천태종, 계율종, 법상종, 선종 등 각 종파 고승들이었다. 그럼에도 의천의 마음 한켠에는 정원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갔다.

스승과 만나 화엄과 천태에 정진하다

변경에 머문 지 한 달이 흘렀을 때 의천은 철종에게 스승 정원을 만날 수 있도록 간곡히 요청했다. 철종은 의천의 청을 받아들였고, 고위관리를 시켜 정원이 있는 항주까지 의천을 모시도록 명했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의천은 항주의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에서 정원을 만날 수 있었다. 이역만리에서 편지만 주고받다가 마침내 첫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두 사람은 감격했다. 의천은 곧바로 스승을 찬탄하는 글을 올렸다.

“비록 강산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하늘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겨자씨를 맞히는 듯 귀한 인연이 있었습니다. 이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말법시대에 불법의 중흥을 서원하며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진리의 등을 밝히겠나이다.”

스승 정원은 고려 승통에 대한 깍듯한 예를 갖추며 아침저녁으로 화엄의 정수를 전하려 애썼다. 제자 의천은 그런 스승의 기대에 부응해 부지런히 정진했다. 정원은 화엄을 근간으로 두되 천태의 참회(懺悔)와 관행(觀行)을 적극 수용해 융화시켰다. 그런 정원의 강의를 듣고 의천은 비로소 화엄과 천태의 조화 문제와 교관(敎觀)의 겸수(兼修)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의천정원의 회상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틈틈이 인근의 고승을 찾아다니며 법을 묻고 전적을 수집해 나갔다. 특히 상천축사(上天竺寺)의 자변종간(慈辯從諫)으로부터 천태의 법을 계승할 수 있었다. 당시 항주에서는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저술한 고려 제관(諦觀, ?-970)의 활동으로 천태종이 크게 부흥했다. 종간은 천태의 법을 계승한 대표적인 고승이었다.

화엄의 법을 이어 불교 전적에 몰두하다

그 무렵 고려에서 입국한 사신들은 철종에게 의천의 모친 인예왕후의 서한을 전했다. 의천이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간곡한 내용이었다. 철종은 의천에게 금·은·비단 등 많은 귀중품을 하사하고 이제 고려로 돌아가도록 했다.

귀국 길에 오른 의천은 퇴락한 절이 있으면 많은 재화를 희사해 수리토록 했다. 특히 정원이 대중상부사에서 옮겨와 머무는 혜인원(慧因院)에 막대한 재물을 보시했고, 경전 7,500여 질을 비롯해 화엄·천태 등 각종 논서들을 비치하도록 했다. 그것은 스승에 대한 보은이기도 했지만 논서들이 널리 읽히면 침체된 화엄종이 부흥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정원의천이 떠나기 전 의천이 화엄의 법을 이었음을 세상에 공표했다. 향로와 불자(拂子)를 건네고 법을 널리 펼 것을 당부했다.

늙은 스승의 안타까운 시선을 애써 뒤로 하고 의천은 1086년 5월12일 명주(明州)를 떠나 7일 뒤인 19일 국경에 도착했다. 고려로 돌아온 의천은 송의 고승들은 물론 고창, 천축, 요, 일본 등지의 승려, 귀족, 국왕들과도 교류하며 불교 전적을 모았다. 23살 때부터 지속해 오다 잠시 중단한 경전 강의도 다시 시작했다. 그렇게 의천은 새벽부터 밤까지 촌음을 아껴가며 전적을 모으고 검토했다.

스승의 유지로 천태종을 개창하다

고려대장경을 주조하는 모습을 그린 민족기록화(최대섭作, 1977년)

그러던 어느 날, 의천은 비통한 소식을 접해야 했다. 1088년 11월 스승 정원이 입적했고, 이에 시자 안현(顔顯)이 정원의 사리를 수습해 가져온 것이다. 안현은 정원이 마지막 순간 의천을 떠올리며 썼다는 편지를 전했다. 화엄종 전통을 지켜달라는 말과 함께 새로 쓴 주석서를 보내니 자신을 위해 교정하고 유통해 달라는 당부였다. 정원은 이 편지에 ‘그대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을 거듭 강조하고 있었다.

의천은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글을 짓고 재를 올리며 스승의 업적을 찬탄했고 다음 세상 화장세계(華藏世界)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다. 의천정원이 직접 쓴 주석서를 직접 교정해 널리 배포했다. 또 법을 펴고 불전을 수집하는 일에 더욱 매진했다. 그 결과 이듬해인 1090년 8월 1,010부 4,857권의 장소(章疏)를 모아 교장(敎藏)으로 간행하고 이를 두루 유포할 수 있었다. 특히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며 1097년에는 국청사(國淸寺)를 건립했고, 그토록 염원하던 천태종을 개창할 수 있었다.

11살에 출가해 일생을 노심초사하며 온 힘을 기울여 구법과 전등의 삶을 살았던 의천. 그의 일이 늘어날수록 건강도 악화되어 갔다. 1101년 10월5일, 의천은 선종임금에 이어 자신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어준 숙종에게 “원하는 바는 정도(正道)를 중흥하는 일인데, 병이 저의 뜻을 빼앗아가니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외호하여 여래의 유교에 부합하도록 하면 죽어도 썩어 없어지지 않을 공덕이 될 것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세수로 47살이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저자 김부식(金富軾)의천의 비문을 지으며 “국사를 다시 이 세상에서 뵐 수 있다면 내 머리칼을 깔아 그 위를 밟고 가게 해드리고 싶다”며 안타까워했다.

의천이 그의 스승 정원과 주고받은 편지는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 전한다.

같이보기

주석

  1.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2. 사진출처: 하늘호수, "중국 항주, 항저우 가볼만한곳 혜인 고려사와 의천 대각국사", 『네이버 블로그 - 느리게 The 느리게』online, 작성일: 2017년 8월 20일.
  3. 사진출처: 하늘호수, "중국 항주, 항저우 가볼만한곳 혜인 고려사와 의천 대각국사", 『네이버 블로그 - 느리게 The 느리게』online, 작성일: 2017년 8월 20일.
  4. 사진출처: 하늘호수, "중국 항주, 항저우 가볼만한곳 혜인 고려사와 의천 대각국사", 『네이버 블로그 - 느리게 The 느리게』online, 작성일: 2017년 8월 20일.
  5. 사진출처: 평화문제연구소, 『조선향토대백과』, 2008. 온라인 참조: "영통사대각국사비", 조선향토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6. 사진출처: "대각국사 묘지석", 주요 소장품 검색, 『소장품』online,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문헌

  • 이상현 옮김, 『대각국사집』, 동국대출판부, 2012.
  • 차차석, 『대각국사 의천』, 밀알, 2000.
  • 오윤희, 『일꾼 의천』, 불광출판사, 2012.
  • 최병헌, 「대각국사 의천의 도송(渡宋)활동과 고려·송의 불교교류」, 『진단학보』 No.71-72, 진단학회, 1991, 359-372쪽.
  • 김상현, 「의천의 연학과 학술사적 위상」, 『천태학연구』 Vol.1, 천태불교문화연구원, 1998, 146-163쪽.
  • 신규탁, 「고대 한중불교교류의 일고찰-고려의 의천과 절강의 정원」, 『동양철학』 Vol.27, 한국동양철학회, 2007, 229-2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