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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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부여(扶餘)는 중국 동북 지방에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왕조 국가이다.

부여의 존속기간은 고조선 후기와 삼국시대 중반에 걸친다. 대한민국 역사 교육에서는 단군고조선에서 모든 한국사가 시작되는 일원적 개념처렴 설명하고 있어 착각하기 쉬우나, 부여는 평양성에 도읍지를 둔 후기 고조선과 동시대에 다른 지역에서 공존한 고대 우리 민족의 국가였으며 고구려, 백제 등 우리나라 주요 국가들이 부여를 계승하면서 한민족의 역사가 계속 이어졌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남부여 등 다양한 부여 국가가 존재하며 고조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치는 않으나 삼국유사의 내용[* 삼국유사 왕력(王歷)편 “제1대 동명왕(東明王): 갑신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 (第一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을 보면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의 아버지[* 보통 북부여의 건국자 해모수로 알려져 있으나 단군과 동일시 하기도 한다.]를 단군으로 표현하는 등 고조선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부여왕 계보

국호

夫餘, 扶餘, 夫余, 扶余, Buyeo. 정장상팡(郑张尚芳), 또는 백스터(Baxter)와 사가르(Sagart)의 중국어 상고음 재구에 의하면 夫餘, 扶餘는 고대 중국인들이 /*pa.la/ '빠라' 또는 /*ba.la/ '바라'로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여의 국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푸후(puhu)'와 어원상 관련이 있다는 설
* 평야를 의미하는 한국어 '벌'의 고어형에서 왔다는 설
* '불'이 어원일 거라는 설. 여기에 왕족의 성씨해씨인 것과 연관지어 태양 숭배나 불 숭배와 관련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다만 解의 상고음은 kre~ke임에 주의.

참고로 '벌'을 고어 표기에서 훈차로 火로 표기한 사례가 많이 발견되므로, 만주어 유래설을 제외한 이름들은 공통적으로 '벌'에 가까운 글자를 음차했다는 의견으로 수렴한다. 하지만 이 모두 명확한 사료가 없어, 그저 추측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한자로 쓸 때 부여의 '부'를 夫로 쓰는 경우와 扶로 쓰는 경우, '여'를 余로 쓰는 경우와 餘로 쓰는 경우가 모두 있다. 삼국지 동이전을 비롯한 중국의 사서에는 대개 부여(夫餘)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사서에는 대부분 부여(扶餘)로 기술하고 있다. [[1]]에서 夫餘와 扶餘를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다.

애초에 餘는 余에서 파생된 글자이기에 전통적으로 餘의 약자로 余를 쓰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현행 표준 한자인 신자체중국간화자(간체자)는 餘를 폐지하고 余로 통합하였다. 단, 余 자가 나타내는 의미가 많기 때문에 중국 간화자의 경우 의미가 혼동될 우려가 있을 경우 '남다'라는 의미를 명시하고자 할 때, 또는 본래 번체자(정체자) 표기에서 余가 아닌 餘였다는 걸 확실히 하고자 할 때, 부수 飠(食)을 饣으로 치환한 馀로 쓰는 걸 허용한다. 그래서 비록 중국어 간체에서 부여를 夫余나 扶余로 적는 게 일반적이지만 夫馀나 扶馀로 적기도 한다.

역사

부여 자체의 일원적인 역사 기록이 없기 때문에 부여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다. 역사 기록에는 북부여, 동부여, 남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등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부여가 여럿 존재한다. 북부여와 동부여에 대해서는 정확한 실체 규명이 힘들고 수많은 학설이 난립하고 있다. 동부여에 대해서는 북부여 왕인 해부루왕이 도읍을 옮기면서 국호가 변경되었다는 것과, 고구려410년에 침공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해부루왕이 천도한 동부여와 고구려가 점령한 동부여를 같은 나라로 보거나 다르게 보는 등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북부여와 해부루왕의 동부여도 완전 별개의 국가로 보는 설과 부여 영토 내에서의 이동 혹은 내부의 대가 세력과 같은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 또 남부여는 백제에서 성왕 시기에 일시적으로 사용한 국호이며, 졸본 부여는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이고, 갈사 부여는 부여 왕족이 부여에서 떨어져 나와 세운 나라 갈사국이다. 여기저기에서 '부여'를 자처한 것으로 보아, 아래에서도 서술하겠지만 현대의 희미한 인상과는 달리 당대엔 의외로 정통성을 상징하는 국호였던 듯하다. 혹은 단일국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마한, 진한, 변한과 같이 일종의 원시국가들을 가리키는 집합체의 개념으로 쓰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대개 일반적으로 부여라 하면 북부여를 지칭하며, 이 영토는 송화강과 눈강이 만나는 만주 길림성의 송눈평야 일대이다. 이들은 이후 국력이 점차 쇠퇴하고, 선비가 발흥하면서 동쪽의 연길 지방과 서쪽의 농안(農安) 지방으로 이동하여 쇠퇴한 이후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전성기 시절에는 서쪽으로는 흉노 - 오환 - 선비와 접했고, 동남쪽으로는 옥저, 숙신 - 읍루 - 물길#s-2과 접했으며 서남쪽으로는 고조선 - 고구려와 접했다. 수도가 위치한 중심지는 346년 전에는 길림 일대, 346년 이후에는 농안 일대로 파악되고 있다.

역사 자체가 부여가 융성했을 시기의 역사는 개략적인 기록만 남아있고, 부여의 쇠락기에 가서야 구체적인 기록이 나타난다. 부여의 유민들은 3~4세기 선비족에게 침략당했을 때 상당수가 요서 지방으로 이주되어 그 지배층들은 전연후연에서 벼슬을 했다. 북부여가 고구려에게 정복된 뒤 5세기경, 북만주로 이동하여 두막루를 세웠다. 또한 부여의 옛 땅에 남아있던 주민들은 고구려, 말갈, 발해의 구성원이 되었다. 두막루 역시 상당히 오랜 기간 잔존해 있었던 듯하다.

건국 시기와 전신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전신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만주 지린 성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로 본다. 서주 ~ 춘추시대 초기에 성립된 서단산 문화는 점차 발전하면서 요동과 북방의 백금보 문화[* 반농반목적 문화로 현재의 길림성 북부 쑹위엔 시 일대였다. 과거 일부 학자들은 이를 동명왕 신화의 '탁리국'과 연관시킨 적도 있다.] 등의 청동기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하였으며,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 같은 청동기 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몽골리안계 인골의 발굴과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계의 유적 및 유물로 분류되는 석관묘, 비파형 동모 및 동검, 가는 무늬 거울 등이 발견된다. 이와 동시에 초기에는 요동 및 한반도 지역의 문화와 유사하면서도 고유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요동 및 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친연 관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석기·청동기 문화인 서단산 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인 대해맹유형(大海猛類型,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을 거쳐 철기 문화인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한 건국 연대는 보통 위만조선과 비슷한 기원전 2세기 ~ 3세기로 보고 있다.

건국 시기는 보통 최소한 기원전 2세기 이전으로 잡고 있다. 그런데 중국 사서인 상서대전, 산해경, 사기 화식열전 등에도 부여가 언급된다. 물론 이것이 국경을 맞대고 있다거나, 기원전 3세기 이전에 건국되었다는 근거는 아니다. 하지만 일부 기록과 유물 등의 존재는 부여 이전에도 원시적 공동체가 이 지역에 오랫동안 지속되어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서단산 문화의 분포는 성읍국가 이상으로 보기에는 매우 작으며, 현재의 지린시 일대에만 나타난다.[* 위에도 언급했듯이, 길림성 북부에는 백금보 문화로 불리는 반농반목적 청동기 문화가 있었다. 또한 남서부에는 철기를 개막한 이질적 문화가 있었다. 이와 같이 청동기시대의 대부분의 북중국 지역은 현재의 1개 성 단위가 4-5개의 이질적 문화권으로 쪼개진, 고대적 부족국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부여라는 나라가 기원전에 존재했다면 이런 부족 중 하나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밖에 없다.]

건국 신화

>북이(北夷) 탁리국(橐離國) 임금(영품리왕)을 모시던 무수리[侍婢]가 임신했다. 임금이 무수리를 죽이려고 하니 무수리가 아뢰되 "크기가 달걀만한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쇤네가 아이를 뱄습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아이를 낳았다. 돼지 우리[豬溷] 안에 (아이를) 버리니 돼지들이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다시 마구간[馬欄]으로 옮겨 말이 (임금) 대신 아이를 죽이게 했다. 말도 입김을 불어 아이가 죽지 않게 했다. 임금이 하늘의 아들이 아닐까 생각하고 그 어미에게 명하여 거두어 노비처럼 키우게 했다. 동명이라 이름짓고 소와 말을 돌보게 했다. 동명은 활을 잘 쐈다. 임금은 (동명에게)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동명을 죽이려고 하니 동명이 달아났다. 남쪽 엄수(掩水)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졌다. 추격병들은 건너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여(夫餘)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 땅에 부여(夫余) 나라가 생긴 연유(緣由)다. 동명의 어미가 처음 임신할 때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동명을 낳아 키웠다. 돼지와 말이 입김을 불어 동명을 살렸다. 몸이 장대(長大)하므로 임금이 동명을 죽이려고 하였다.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었다. 하늘의 운명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므로 돼지와 말이 (동명을) 구해주었다. 부여에 수도를 정하고 임금이 될 운명이므로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동명을) 도와주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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