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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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2년 8월 11일 (목) 21:53 판 (양아들(법적아들) 사도세자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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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 21대 국왕 영조의 정비.

성은 서씨이며 본관은 달성.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이며 1692년 태어났다. 1704년 연잉군 이금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책봉되고, 1721년(경종 1년) 20대 국왕 경종이 이복아우 연잉군 이금을 왕세제로 책봉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된다. 1724년 경종의 양위를 받은 남편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식 왕비가 되었다. 남편 영조와의 사이에서 소생은 없으며 창덕궁 관리각에서 66세로 사망하였다.

사망할 때까지 무려 33년을 재위하여 역대 조선 왕비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길었던 왕비였다. 능호는 홍릉(弘陵)이다.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1]] [[2]]

가족 관계

  • 고고조할아버지:서성(徐渻 판중추부사 종1품)
    • 큰고조할아버지:서경우(徐景雨 우의정 정1품)
      • 큰증조할아버지:서원리(徐元履 함경도 감사)
        • 큰할아버지:서문중(徐文重 영의정 정1품)
    • 고조할아버지:서경수(徐景需 전첨)
      • 큰증조할아버지 : 서택리(徐擇履)
      • 증조할아버지 : 서형리(徐亨履)
        • 할아버지: 서문도(徐文道 사평(司評))
          • 아버지: 서종제(徐宗悌 영조의 국구.달성부원군)
            • 본인: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 아들: 서명백(徐命伯 증 이조판서)
              • 손자: 서신수(徐信修 증 좌찬성)
                • 증손자: 서유녕(徐有寧 이조판서 정2품)
                  • 고손자: 서용보(徐龍輔 영의정 정1품)

남편 영조와의 관계

영조와는 사이가 별로 안 좋다못해 최악이었다. 영조는 아예 정성왕후를 창덕궁으로 보내고 자기는 경희궁에 있으면서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정성왕후의 환갑잔치도 파토났고,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사도세자는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는데 자기는 느릿느릿 와서는 그 와중에 슬퍼하는 사도세자더러 "니 옷 꼬라지 그게 뭐냐?"라고 꾸중만 했다.

두 부부 사이가 최악인 건 궁궐 내에서도 공공연한 일이었는지, 정성왕후는 사망하기 14년 전인 1743년부터 영조에게 통증을 호소했으나 영조는 오히려 증 가지고 엄살 부린다고 씹어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그녀의 용태를 진찰한 의관도 애초에 영조가 자기 마누라 얘기라면 들은 척도 안할 것이니 영조를 모시는 내시에게 대신 보고할 정도였다.

1752년 11월 23일에는 "중전의 회갑인데 하례를 드리게 하자"는 우의정 김상로의 요청을 거절하면서, 사도세자에게 "네 엄마[* 물론 혈육상으로는 양엄마이며 법적으로 엄마의 관계이다.]의 회갑이랍시고 잔치까지 벌일 것이 있느냐"는 내용의 글을 써서 보내는 일도 있었다.[28년 11월 23일] 그로부터 15일 후 영조는 양위 파동을 벌여 홍역을 앓다 나은 지 한 달밖에 안 됐던 사도세자를 눈밭에서 석고대죄시켰다.

양아들(법적아들) 사도세자와의 관계

반면 사도세자와는 친아들이 아님에도 의외로 사이가 좋았다. 실제로 정성왕후는 살아 생전에 자신의 시어머니인 인원왕후와 더불어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아끼고 보호하는 인물이었으며, 사도세자 역시 냉혹한 성격의 부왕한테 당하는 핍박 속에서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정성왕후에게 의지하며 극진히 대우했다고 한다. 정성왕후가 사망하자 사도세자가 밖에서 '소자가 왔다'며 통곡했을 정도. 어찌보면 정성왕후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중압감을 주는 처지를 보고 동병상련을 느꼈을 수도 있다. 다만 말이 아들이지 사도세자가 영조의 마흔둥이었기 때문에 정성왕후와도 나이가 40년 이상 차이가 나서 (당시 기준으로는) 할머니와 손자뻘이 된다. 사도세자의 친모인 영빈 이씨와도 그럭저럭 관계가 괜찮았다고 한다.

야사

야사에는 정성왕후가 연잉군 시절의 영조에게 시집온 첫날 있었던 일 때문에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혼인 첫날밤 영조가 정성왕후의 손이 참 곱다며 감탄했는데 정성왕후가 무심코 "부잣집에서 태어난 덕에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영조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보기에는 이게 소박맞을 만큼 잘못한 말인가 싶겠지만, 영조에게는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마누라의 대답을 출신이 미천한 자기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숙빈은 무수리 출신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출신이 불분명해서, 어렸을 때 고생을 많이 한 탓에 손마디도 굵고 손이 거칠었다고 한다.

그런데 정성왕후의 조카인 서덕수 때문에 곤경에 처한 일이 있어서 정성왕후를 미워하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서덕수는 다름아닌 경종을 죽이고 영조를 옹립하려는 삼수의 옥의 주모자 중 하나였으며, 영조에게 "저하를 위해 모의하고 있으니 알아두시라." 고 발언하기도 했다. 덕분에 영조는 경종 앞에서 폐세제를 자처하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이 말을 세상에 알린 게 다름 아닌 영조이다. 즉 이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병과 죽음

1757년 사망 당시 한중록에 따르면 심하게 각혈을 하고 팔다리가 심히 부었다는 애기가 나온다. 현대로 치면 위궤양에 부정맥이 겹쳐서 세상을 떠난걸로 보이는데 이 당시 남편 영조의 태도가 그야말로 막장이다. 영조는 죽은 마누라의 빈소를 지킬 생각은 안 하고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사망한 사위 정치달(화완옹주의 남편)의 문상을 갔다. 이는 궁중 예법에도 어긋나고 인간적으로도 지나친 처사라 대신들과 대간이 경악하여 심하게 반대했지만, 영조는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체차[* 관리의 임기가 차거나 부적당할 때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일.]해버리면서까지 강행했다. [33년 2월 15일 정축 3번째기사]

죽음 이후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양(서울)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 지역에 묻힌 건 영조의 뜻이 아니라 정조정순왕후 김씨를 배려한 탓이었다.[* 과거 문정왕후중종장경왕후랑 묻힌 꼴은 못 보겠다고 이장을 했으나 비만 오면 물에 잠기는 곳이라 무산되었다. 문정왕후나 정순왕후나 남편에 대한 정은 있었던 모양.] 영조는 (아내를 떠나보낸 후 뒤늦게나마 미안했는지) 오히려 정성왕후 옆에 묻히려고 빈자리를 마련했다. 정조는 지금의 원릉 자리에 영조를 장사지냈는데, 이 자리는 원래 효종이 매장되었다가 비가 샐 우려가 있다 해서 천장된 파묘 자리였다. 석물이 해를 거르지 않고 기우는 등 최악에 가까운 자리였다. 더군다나 경종을 여기에 장사지내자는 신하들의 주청에 영조는 '국장에 어떻게 파묘 자리를 쓰겠느냐'고 물리쳤던 적도 있었다. 손자에 의해 민간에서도 묏자리로 기피하는 파묘 자리에 잠든 것. 물론 이것만으로 정조가 영조에게 불효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한 효성 하나는 지극했다. 나중에 경종에게 신하 노릇 하기 싫었다는 신하를 보며 "우리 할아버지(영조)가 형님 되시는 경종대왕께 한 우애가 얼만지 아느냐"며 분노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라 단명했을 거라 오해하겠지만 실제론 장수하신 분이다. 1757년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는 만 65세. 남편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당시 기준으로 꽤 장수한 것이며, 평균수명이 길어진 요즘 기준으로도 일찍 돌아가셨단 소리 듣기에는 애매한 수준이다. 자녀를 낳지 못해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인 사도세자를 친자식처럼 돌보지만... 임오화변이 발생했을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가 마지막으로 찾은 장소가 바로 정성왕후의 위패가 있는 휘령전이었다. 두 사람이 위패에 절을 한 직후, 갑자기 영조는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가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말하였다."고 주장하며 궁을 봉쇄하고 사도세자를 처단하게 된다.

종합적으로 보면 폐비가 되지 않았을 뿐, 내쫓기지 않은 조선의 왕비 중 제일 안습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몇십년 동안 남편인 왕에게 계속 홀대받았는데 정성왕후의 죽음을 남편인 영조는 세자를 죽이는데 이용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말실수를 한 것이든 조카 때문에 곤란에 처한 것이든 둘 중 어느 것이 사실이든 정성왕후가 크게 잘못한 것은 사실상 없는데도 홀대를 수십년 동안이나 받았다. 어찌보면 못난 남편 탓에 폐비가 되긴 했지만 정작 자신은 남편과 사이가 괜찮았던 연산군의 왕비 폐비 신씨[* 연산군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여러 명 낳을 정도로 사이가 좋았던 데다가, 사화를 일으키며 미쳐 돌아가는 연산군에게 충언을 해도 무사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에 연산군도 폐위되어 죽기 직전에 중전(폐비 신씨)이 보고 싶다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고 한다.]보다 안습하다고 볼 수 있다.

창작물에서

무수한 영조의 출연작들에 비해 출연 빈도가 적다. 거꾸로 말하면 이하의 작품들은 그나마 최소한의 고증과 구색엔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된다.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한중록 편 - 김애경
* 대왕의 길 - 문예지
* 동이 - 신규리(아역), 정모레(성인)
연잉군 시절 영조와 갓 혼례를 맺은 어린시절의 모습으로 나오며 별다른 역할없이 인원왕후에게 문후를 올리러 가는 모습 정도로만 등장한다. 마지막화에서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함께 중전의 자리에 오른다. 
* 군주 - 가면의 주인 - 김선경
* 해치 - 최수임

영화

* 상의원 - 박신혜
* 사도(영화) - 박명신
2010년대에 임오화변을 다룬 대표 작품인 이 영화를 통해 정성왕후를 알게 된 사람이 적지않게 많다.
실제 역사대로 초반부에 시어머니인 인원왕후와 함께 의붓아들인 사도세자를 어린 시절부터 매우 귀여워하며 예뻐한다. 또한 영조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점도 묘사된다. 극중에서 영빈 이씨가 영조의 성격이나 버릇을 갓 시집온 혜경궁에게 알려주는 부분에서도 자기는 총애받지 못해 잘 알지 못하는 부분이라 씁쓸해한다. 하지만 영빈 이씨가 환갑 잔치까지 건의해줄 만큼 대접을 해주는지라, 둘 사이엔 큰 다툼 없이 그럭저럭 잘 지낸다. 노년에 거동이 힘들 때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한 것도 다름아닌 영빈 이씨다.[* 심지어 배역을 맡은 박명신은 영빈 역할을 맡은 전혜진이 추천해서 영화에 합류했다고 한다.] 실제 역사에서는 대비인 인원왕후보다 한달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영화 속에서는 인원왕후가 시름시름 앓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며 인원왕후와 달리 승하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과 장면이 없다. 사도세자의 광증이 발발한 이유에는 자신을 아껴주던 정성왕후의 죽음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나마 등장한 이 영화에서도 실제 역사보다 비중이 낮게 책정된 편.
* 궁합(영화) - 김분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