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대
서유대(徐有大 , 1732년 ~ 1802년)은 조선시대의 무신, 군인이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자겸(子謙).
대구 서씨 시조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생애
아버지는 일수(逸修)이다. 1757년(영조 33) 문음(門蔭)으로 선전관이 되었고, 2년 후 사복시내승(司僕寺內乘)으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1763년 훈련원정으로 일본 통신사를 호종하여 일본에 다녀왔다. 귀국 후 방어사·겸사복장(兼司僕將)을 거쳐 1768년 충청수사에 임명되었다. 다음 해에 전라병사가 되었으나, 부임 도중 전라감사 김상익(金相翊)의 속예(屬隷)의 불법을 다스리다가 김상익의 무고로 파직당하였다.
곧 승지를 거쳐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며 이어서 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전선(戰船)의 전복으로 일시 삼수부에 유배되었다. 1783년(정조 7) 총융사(摠戎使)로 재기용되었고, 훈련도감중군·좌포도대장·어영대장을 거쳐 금위대장이 되었다. 이 때 금위영이 나례도감(儺禮都監)과 함께 주악(奏樂)을 연습하다가 화포를 잘못 쏘아 궁궐에 불이 나게 되자, 책임을 물어 추고(推考 : 징계함)당하고 파직되었다.
다시 우포도대장으로 기용된 후 금위대장·훈련대장·어영대장·주사대장(舟師大將) 등을 지냈다. 이와 같은 5군영 지휘관 역임은 통산 총융사 4번, 어영대장 7번, 훈련대장 3번, 금위대장 7번으로서 정조 때의 군권을 장악한 핵심 인물이었다.
그 사이 남항(南行 : 조상의 덕으로 벼슬함) 출신의 무관 임명 문제에 대한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으며, 직사(職事) 처리의 잘못으로 강화부 군졸로 충군(充軍) 또는 전리(田里)에 방축되기도 하였다. 그 뒤 한성판윤을 거쳐 1802년(순조 2)에 훈련대장으로 죽었다.
체격이 크고 성품이 너그러워 군졸의 원성을 산 바가 없어 당시 사람들은 그를 복장(福將)이라 불렀다고 한다. 글씨에도 능해 대자(大字)를 잘 썼다고 전한다. 시호는 무익(武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