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겸
정의
1557(명종 12)∼1617(광해군 9).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화익(和益), 호는 죽계(竹溪). 아버지는 문학습독 서진(徐津)이며, 어머니는 부림홍씨(缶林洪氏)이다. 서사원(徐思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徐文翰 현감)
- 고고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생원)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생원)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생애 및 활동사항
성리학에 잠심(潛心), 궁구(窮究)하고 명리(名利)를 탐내는 마음이 없었다. 정사철(鄭師哲)·손처눌(孫處訥) 등과 도의로 교제하며 향풍(鄕風)의 교화에 힘썼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서재겸의 형 서득겸(徐得謙)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과 싸웠다. 당시 곽재우(郭再祐)가 이끄는 의병들은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그 곳으로 의병을 이끌고 가는 도중 낙동강 상류인 아금암(牙琴巖)에서 왜적을 만나 접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형 서득겸을 비롯한 많은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그 후 서재겸은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화왕산성의 곽재우 휘하에 들어가 많은 전공을 세웠다. 16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도 서재겸은 팔공산에서 각 지방의 의병장과 회맹(會盟), 적과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였다. 서재겸은 시문에도 능하여 당시에 있었던 일을 시·일기 등으로 기록해 놓았다. 저서로는 『죽계유고(竹溪遺稿)』 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