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변
서변(徐忭)
정의
조선 후기 달성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가계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자경(子慶), 호는 용계(龍溪). 증조할아버지는 서응기(徐應基)이고, 증조할머니는 찰방을 지낸 박사림(朴士林)의 딸 밀양 박씨(密陽朴氏)이다.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서함(徐涵)이며, 할머니는 부장(部長)을 지낸 하한수(河漢壽)의 딸 숙부인 진양 하씨(晉陽河氏)이다. 아버지는 증장악원 정(贈掌樂院正) 서사건(徐思建)이고, 어머니는 주부(主簿)를 지낸 권응룡(權應龍)의 딸 숙부인(淑夫人)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부인은 정일신(鄭日新)의 딸 숙부인 초계 정씨(草溪鄭氏)이다. 서변의 후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다.
가족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활동 사항
서변(徐忭)[1605~1656]은 1605년(선조 38) 대구도호부 산격리(山隔里)[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서 출생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손처눌(孫處訥)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유시번(柳時蕃)·정호인(鄭好仁)·정시명(鄭豕明)·도경유(都慶愈) 등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며, 1623년(인조 1) 문과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그해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이 되었다.
1634년(인조 12) 홍익한(洪翼漢), 정온(鄭蘊)과 동도회(同道會)에서 활동하는 등 여러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1635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임명되었다가 경성 판관(鏡城判官)으로 부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생하였는데, 서변은 청나라와의 화의를 반대하던 인사 중 한 명이었다. 1639년(인조 17) 황주 판관(黃州判官)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병환으로 나아가지 않고, 대신 진해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1644년(인조 22)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1645년 연서도 찰방(延曙道察訪)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651년(효종 2)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이 되었는데, 이 해에 방해(防海)와 관련된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1652년 예조 정랑(禮曹正郞)·홍청도 도사(洪淸道都事)에 임명되었으며, 숭선군(崇善君)과 낙선군(樂善君)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1653년(효종 4) 다시 예조 정랑이 되었는데, 이때 효종(孝宗)이 기우제를 지낸 후 단비가 내리자 시종하는 신하들에게 희우시(喜雨詩)를 짓게 하였다. 서변도 시를 지었는데, 13인 중 장원을 차지하여 효종으로부터 말안장과 호피 등을 상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해 형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며, 풍기 군수로 부임하였다.
1655년(현종 6)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서학 교수(西學敎授)·예조 정랑(禮曹正郞)이 되었으며, 1656년(현종 7) 상소문을 올려 김홍욱(金弘郁)의 신원을 요청하였다. 그해 5월 천안 군수로 부임하였다. 천안 군수로 있으면서 인평 대군(麟坪大君)의 처남 오정일(吳挺一)을 비롯해 허적(許積)·이완(李浣)·원두표(元斗杓) 등이 역적 모의했다고 고발하였다. 인평 대군이 오정일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참석했는데, 승지(承旨) 유도삼(柳道三)이 술에 취하여 인평 대군 앞에서 자신을 ‘신하’라고 칭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서변이 오정일 등을 고발하였으나 오히려 효종은 서변을 무고죄로 처벌하였다. 체포된 서변은 심한 국문을 당하였고, 결국 장살(杖殺)되었다.
학문과 저술
문집으로 4권 2책의 『용계집(龍溪集)』이 전한다.
묘소
묘는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묘곡(妙谷)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68년(영조 44)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에 세워졌던 옥계 서원(玉溪書院)에 배향되었는데, 옥계 서원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집권기 때 훼철된 후 현재는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의 달성 서씨 현감공파 문중에는 「효종 어전 희우시회 인물도(孝宗御前喜雨詩會人物圖)」가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1653년 서변이 희우시를 짓는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대구광역시 유형 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옥계서원(玉溪書院)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서균형과 서변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문화재자료.
1798년(정조 2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균형(徐鈞衡)과 서변(徐忭)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에 복원하지 못하였다.훼철되기 전의 경내 건물로는 사우(祠宇)·신문(神門)·중당(中堂)·동재(東齋)·서재(西齋)·전사청(典祀廳)·고사(庫舍) 등이 있었다.
가창면 대일1리 대일박마을 달성 서씨 집성촌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1리에 있는 달성 서씨 동성 마을. [개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1리 대일박마을은 달성 서씨(達城徐氏) 집성촌이다. 이 마을은 1570년(선조 3)경 영동 김씨(永同金氏)들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하며, 1670년 조선 효종(孝宗) 때 천안 군수 달성인 서변(徐忭)이 임금에게 직소하였다가 곤장을 맞고 죽자 그 후손들이 피신하여 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 서씨들의 세거 집성촌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50여 가구의 달성 서씨들이 거주하고 있다. 마을에는 1798년에 건립한 달성인 학암(鶴岩) 서균형(徐鈞衡)을 주향하고 용계(龍溪) 서변(徐忭)을 배향하는 오계 서원이 있다. 서균형은 고려공양왕(恭讓王) 대의 문신으로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과 양광도(楊廣道)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다. 한편 서변은 한전 유세교의 반란을 직소하였다가 오히려 화를 입어 죽었다. 후에 서변의 충정이 후손들에 알려졌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는 큰 골짜기에 있다 하여 대일(大逸)이라 이름 붙여졌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대일리는 동편을 남북으로 병풍산[567.7m]이, 서편을 남북으로 주암산[854.7m]이 크게 두르고 있는 가운데 위치하여 마을 명칭과 같이 골짜기에 형성되어 있다.
대일박마을을 관통하는 길가에 자리 잡은 달성 서씨 서당 건물이 현재 남아 있다. 지금은 세입자가 살림집으로 고쳐 살고 있는데, 장방형 대지의 중앙에 우물이 있는 마당을 중심으로 북쪽에 서당이 있고, 서쪽에 대문간과 변소가 있다. 서당은 방 두 칸에 마루 한 칸을 둔 세 칸 규모에 전면으로 툇마루를 놓았다. 살림집으로 개조하면서 방 왼쪽에 부엌을 증설하고, 창호와 쪽마루 등이 제거되는 변화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