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지식 관계망) |
(→참고문헌) |
||
129번째 줄: | 129번째 줄: | ||
==참고문헌== | ==참고문헌== | ||
− | |||
===더 읽을거리=== | ===더 읽을거리=== |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66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66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 | ||
144번째 줄: | 143번째 줄: | ||
* [https://namu.wiki/w/%EC%98%81%EC%A1%B0 나무위키: 영조] | * [https://namu.wiki/w/%EC%98%81%EC%A1%B0 나무위키: 영조] | ||
===유용한 정보=== | ===유용한 정보=== | ||
− | + | *정지천,"[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02/2014040202963.html 조선왕 수명 47세, 영조대왕 83세...비결은 왕성한 신장의 정기]", 『프리미엄조선』, 작성일: 2014년 04월 03일. | |
[[분류:궁중기록화]] [[분류:인물]] [[분류: 한글고문서]] [[분류:역사인물초상화]] | [[분류:궁중기록화]] [[분류:인물]] [[분류: 한글고문서]] [[분류:역사인물초상화]] |
2017년 9월 1일 (금) 00:52 판
조선 영조 (朝鮮 英祖) |
|
대표명칭 | 조선 영조 |
---|---|
한자표기 | 朝鮮 英祖 |
지위/역할 | 조선의 제21대 왕 |
이칭/별칭 | 자 광숙(光叔) 휘 금(昑) 호 양성헌(養性軒) 연잉군(延礽君) |
재위기간 | 1724년 8월 30일-1776년 3월 5일(음) |
출생사망 | 1694년 9월 13일-1776년 3월 5일(음) |
능묘 | 원릉(元陵) 37.620781, 127.129345 |
배우자 | 정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계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
자녀 | 2남 12녀, 진종(眞宗), 사도세자 |
부친 | 숙종(肅宗) |
전임자 | 경종(景宗) |
후임자 | 정조(正祖) |
목차
정의
조선의 제21대 왕이다.
내용
생애
이름이 금(昑)으로, 숙종의 아들이며, 어머니가 숙빈 최씨(淑嬪 崔氏)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졌고, 1721년(경종 1) 왕세제로 책봉됐다. 1724년(영조 즉위) 왕위에 올랐고, 1757년(영조 33) 원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徐氏)가 세상을 떠나자 상기를 마친 후 계비로 정순왕후 김씨를 맞아들였다.
거행 의례
탕평의 시도
조선 영조는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주도가 된 무신란(이인좌의 난)(戊申亂(李麟佐─亂))과 1755년(영조 31) ‘ 을해옥사(나주괘서사건)(乙亥獄事(羅州掛書事件))’으로 인해 소론 세력의 도전을 받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762년(영조 38) 소론과 관련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노론의 주장에 따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는 사도세자 사건(思悼世子事件)을 겪는 등의 정치적 파란도 있었지만 조선 영조는 일관되게 탕평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조선 영조가 추구한 것은 ‘완론탕평(緩論蕩平)’으로, 노론과 소론 사이의 탕평에서 벗어나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이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오광운(吳光運), 채제공(蔡濟恭) 등의 남인과 남태제(南泰齊) 등의 북인까지 끌어들였다. [1]
민생안정 추구
백성들이 국민의 의무를 대신하여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均役法)을 제정하여 세금 제도의 합리화를 기하는 한편, 민중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다. 일반 백성의 여론을 직접 정치에 반영시키기 위해 신문고(申聞鼓) 제도를 부활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왕에게 직접 알리도록 하였다. 형벌제도에 대해서도 압슬형(壓膝刑)을 폐지하고, 사형을 받지 않고 죽은 자에게는 추형을 금지시키거나,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三審制)를 엄격하게 시행하여 형살(刑殺)에 신중을 기하게 하고, 남형(濫刑)과 경자(鯨刺) 등의 가혹한 형벌을 폐지시켰다. 또한 금주령(禁酒令)을 내려 사치·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2]
법과 의례 관련 서적 편찬
법과 의례를 조선후기 실정에 맞게 재정비하기 위해 속대전(續大典),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편찬하였으며, 백과사전류인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만들었다. 이 외에도 균역법의 전형인 양역실총(良役實摠)을 각 도에 인쇄하여 반포함으로써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자신의 왕위 정통성을 천명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적을 반포하였는데, 1751년(영조 31) 천의소감(闡義昭鑑)이 대표적이다. 성리학적 지식과 학문이 뛰어난 조선 영조는 스스로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을 비롯하여 어제경세문답(御製磬世問答) 등의 글을 짓기도 하였다. [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조선 영조 | 이인좌의 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728년 |
조선 영조 | 을해옥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1755년 |
조선 영조 | 사도세자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
조선 영조 | 균역법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조선 영조 | 신문고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조선 영조 | 삼심제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조선 영조 | 금주령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금주령 | 어제계주윤음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영조 | 속대전 편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속대전 편찬 | 속대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영조 | 국조속오례의 편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국조속오례의 편찬 | 국조속오례의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영조 | 동국문헌비고 편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동국문헌비고 편찬 | 동국문헌비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영조 | 양역실총 편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양역실총 편찬 | 양역실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영조 | 천의소감 편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천의소감 편찬 | 천의소감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영조 | 어제자성편 편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어제자성편 편찬 | 어제자성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영조 | 어제경세문답 편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어제경세문답 편찬 | 어제경세문답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대사례의궤 | 조선 영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 조선 영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정순왕후 김씨 | 조선 영조 | A는 B의 아내이다 |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 정순왕후 김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699년 | 조선 영조가 연잉군에 봉해졌다. |
1721년 | 조선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
1724년 | 조선 영조가 즉위하였다. |
1728년 | 조선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였다. |
1755년 | 을해옥사가 일어났다 |
1759년 | 조선 영조가 정순왕후 김씨와 혼례를 올렸다. |
1762년 | 조선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이정민, "조선 영조",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정민, "조선 영조",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이정민, "조선 영조",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실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동궁일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어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대왕의 도포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주영조태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어필-숙빈최씨사우제문원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어필-숙빈최씨소령묘갈문원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영조어필-읍궁진장첩
- 네이버캐스트: 영조
- 위키백과: 조선 영조
- 나무위키: 영조
유용한 정보
- 정지천,"조선왕 수명 47세, 영조대왕 83세...비결은 왕성한 신장의 정기", 『프리미엄조선』, 작성일: 2014년 04월 0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