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역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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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역법
(均役法)
대표명칭 균역법
한자표기 均役法
유형 제도



정의

조선 후기 영조 때 양역제(良役制)를 개선하기 위해 실시한 재정제도이다.[1]

내용

균역청 설치

1750년(영조 26) 균역청을 설치하여 종래 양역(良役)에 관한 부세제도를 개정하였다. 16세-60세의 양인정년자(良人丁年者)로부터 1년에 군포(=양포·보포) 2필(疋)씩을 징수하던 것을 1필로 감하고 세수 감액분을 결미(結米)·결전(結錢), 어(漁)·염(鹽)·선세(般稅), 병무군관포(逬武軍官布), 은·여결세(隱·餘結稅), 이획(移劃) 등으로써 충당케 하였다.[2]

균역볍 논의과정

논의는 1750년(영조 26) 5월 호조판서 박문수의 호전론(戶錢論)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이때의 호전론은 호당징수량(戶當徵數量)이 예상을 초과하여 산출되고 호적법이 미비하여 결국 무산되지만 그것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감필과 결부시켜 시행하려는 논의가 일어났다. 즉 감필을 하고 부족분을 호전으로 충당한다는 감필호전론(減疋戶錢論)이었다. 이것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영조는 같은 해 7월 전격적으로 양역의 부담을 반으로 줄여 1필로 균일하게 하는 내용의 감필을 단행하였다.[3] 그리하여 1750년 7월에 균역청이 설치되고 보충재원의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되었다. 결손재원(缺損財源)의 보충 대책은 감혁(減革), 이획(移劃), 병무군관포(逬武軍官布), 해세(海税), 결전(結錢), 은·여결세(隱·餘結稅), 분정(分定) 등이 있다.[4]

미미한 성과

그러나 균역법의 성과는 현안이던 조선 후기 사회의 현안 문제였던 양역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척결하는 개혁이 되지 못하였고, 감필을 통해 농민 부담을 약간 줄여준 데 불과하였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당시의 군포 징수가 매정단위(每丁單位)가 아닌 촌읍단위(村邑單位)였으므로 실제 혜택이 얼마만큼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균역법 실시 직후 바로 이에 대한 비판이 일어나고, 삼정(三政) 중의 하나인 군정의 문란이 말기까지 이어진 점은 균역법의 성과가 크지 못하였음을 말해준다.[5] 이렇게 하여 군포 1필이 감해졌으나, 군포의 근본적인 성격에는 변동이 없었으므로 군역대상자의 도망가는 일은 여전하였다. 또 도망자·사망자의 군포가 면제되지 않아 이를 다른 양인이 2중·3중으로 부담하게 되었다. 이에 양인들은 계속되는 무거운 군역에 불만을 품고, 철종(哲宗) 대에 이르러 농민반란으로까지 발전하였다.[6]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균역법 박문수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균역법 균역청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영조 균역청 A는 B를 설립하였다 A ekc:Founder B

시각자료

주석

  1. 정만조, "균역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박은태, 『경제학사전』, 경연사, 2011. 온라인 참조: "균역법", 경제학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3. 정만조, "균역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박은태, 『경제학사전』, 경연사, 2011. 온라인 참조: "균역법", 경제학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5. 정만조, "균역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균역법",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균역법",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박은태, 『경제학사전』, 경연사, 2011. 온라인 참조: "균역법", 경제학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정만조, "균역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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